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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1922) - 야마카와 히토시 본문

일본 좌파 운동 번역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1922) - 야마카와 히토시

0079char 2021. 2. 7.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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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가 달린 각주를 제외한 나머지 각주는 전부 원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1954년 대화를 나누는 노농파의 중심 인물들. 좌측부터 사키사카 이츠로(사회주의협회 대표), 야마카와 키쿠에(사회주의 여성해방론 이론가, 야마카와 히토시의 아내), 야마카와 히토시.

 

1. 우익과 좌익의 견해

 

  급진 분자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보수적인 분자는 언제나 그들을 저지하려 한다. ー일에는 순서가 있다, 우리는 한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고,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씩 차근차근 밟아 나아가야 한다, 라면서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진리이다. 10리 길을 가든 100리 길을 가든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밟아나가야만 한다. 이 점은 서두르는 사람도 여유로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주의자도 급진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첫걸음을 떼는 것은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이다. 보수주의자는 첫걸음을 떼는 것까지는 알지만,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것을 잊는다.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은 지금 막 첫걸음을 뗐다. 우리는 두 번째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

 

 

2. 소수자의 운동에서

 

  무산계급 운동은 먼저 대중보다 앞서 계급적으로 각성한 소수자의 운동에서 일어난다.

  계급의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의식은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대립하고 있는 삶의 현실이 우리의 머리에 비친 반사된 상이다. 계급의식은 비범한 천재 몇 명만이 의식할 수 있는 난해한 이론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무산계급 전체의 머릿속에 응당 골고루 생겨나는 의식이다. 골고루 생겨나야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소 이른가 늦는가 하는 차이는 있다. 태양은 정확히 5시쯤 수평선에 떠오른다. 그러나 모든 초목에 동시에 균일하게 태양 광선이 닿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태양은 무산계급 전체에 한결같이 내리쬐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태양의 반사광인 계급의식이라는 광선은 우선은 몇몇 사람들의 머리에서만 명확하게 반사된다. 그래서 계급의식을 각성한 무산계급 내의 소수자의 운동이 먼저 나타난다.

  이 소수의 선구자는 먼저 자신의 머리에 반사된 사상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연히 자신과 주위의 대중을 구별한다. 무산계급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심리와 사상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 그래서 몇몇 선구자들은 먼저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한 사상의 독립을 이뤄야 한다. 그렇기에 자연히 자신의 주변 대중과 어느 정도 사상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 무산계급 대중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ー다시 말해,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상적으로 빠져나온ー 소수자가 결속하여 아직 단결도 의식도 없는 혼탁한 무산계급 대중 사이에서 작고 희미한 덩어리를 형성한다.

  이 시기는 소수의 선각자가 먼저 자신을 명확하게 보고 규정해야 하는 시대였다. 무산계급 운동의 목표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이 자그마한 덩어리는 점점 사상적으로 순수해지고 철저해진다. 이들의 계급의식은 점점 선명해지고 자본제에 대한 생각들은 점점 심화되며 필연적인 결론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한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자본제 자체를 철폐하는 것 이외에 무산계급의 해방은 없다는 명확한 사상에 도달한다. 그리고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하는 것이 이 이후의 목표가 될 한 순간의 ××[각주:1]적 행동이며, 그 이하의 행동 ー눈앞의 일상생활을 개선하려는 운동 따위ー 은 필경 가치가 없다는 분명한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몇몇 선구자의 언동은 점점 급진화되고 갈수록 '혁명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계급의식이 아직 뚜렷하지 않고 계급적 단결도 조직도 없는 혼란스러운 무산계급 대중 가운데 극히 소수이나 철저한 사상에 입각한 철저한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전투적 분자가 태어나고, 이 분자가 어떠한 형태로 결합할 때 무산계급 운동은 드디어 첫걸음을 뗀다. 그리고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은 그 첫걸음을 떼었다. 훌륭하게 떼냈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

 

 

3. 사회주의 운동의 제1기

 

  이것은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의 두 방면 ー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ー 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나는 두 운동을 두 개의 무산계급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산계급 운동의 두 방면이라 부른다. 사회당(무산계급의 정치적 단체)[각주:2]의 운동과 노동조합(무산계급의 산업적 단체)의 운동은 두 종류의 무산계급 운동이 아니라 무산계급 운동의 두 방면이며, 이 두 운동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지금까지의 일본 사회주의 운동은 극소수의 운동이었다. 이 소수는 자본주의 자체의 성숙과 발달에 따라 증가했음에 틀림없다. 지금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튼 일본의 사회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한 번도 대중적 운동이 아니었다.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으로 철저했다. 적어도 전쟁 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비하면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으로 철저히 순수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으로 철저하고 순수하기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바로 대중과의 유리이다.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지난 100년은 먼저 자신을 무산계급 대중과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한 시대였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무산계급의 대중이 완전히 자본주의의 심리와 사상과 지배당하던 시절 독립된 무산계급의 사고와 사상과 견해를 쌓기 위해 필요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이 점에서는 성공했다.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과거 20년을 거치며 항상 계급투쟁 주의와 혁명주의 위에 서 있었다.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사상에는 한 번도 타협주의와 기회주의와 개량주의가 섞인 적이 없다고 해도 좋다.

  아마 일본의 사회주의자만큼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최종 목표만을 확실하게 지향하던 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최종 목표를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을 잊었다. 어떻게 이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잊었다. 우리는 자본제 철폐라는 이상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이 중요한 이상에 벌레가 붙지 않도록, 얼룩이 생기지 않도록, 언제까지나 그 순수성과 순결성을 잃지 않도록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그리고 자본제를 즉각 철폐할 수 없는 일체의 문제나 운동에는 어떤 흥미도 없었다. 국가를 부르주아의 지배 도구라고 보면, 무산계급이 국가에 어떤 일을 요구하든 시시하다! 정부를 자본가 계급의 위원회라고 보면 그 정부의 정치를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본들 시시하다! 자본제가 존속하는 한 부분적 개선을 얻은들 시시하다. 전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혁명) 이외의 일체의 당면 문제는 시시하다! 이것이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주의자의 태도였다.

                       

4. 우리는 그릇되어 있었다 [각주:3]

 

 그러나 이런 결벽적인 "혁명적" 태도를 취하게 되면 자본제 하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그저 초지일관 주둥이나 펜 끝으로 부정이나 하고 있고, 우선 백 명이든 이십 명이든 패거리가 모여서는 혁명의 날을 상상하곤 기염을 토하고, 순경을 상대로 '혁명적'인 행동에 나서고 하룻밤 검속을 받고는 크게 "반역의 정신"을 만족시키는 정도가 고작이다. 자본제도를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제 자체에 손가락도 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 사회주의 운동이 사상적으로 정제될수록 무산계급 대중과 멀어져 간다. 이와 같은 태도는 허무주의자의 이상이지 결코 사회주의 운동 ー즉 무산계급의 대중적 운동ー 의 태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이런 오류에 빠져 있었다.

  무산계급 운동의 첫걸음은 계급적으로 각성한 소수가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 아래에 있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후 사상적으로 독립하고 사상적으로 정제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무산계급 운동은 한 번은 이러한 시기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무산계급 운동의 첫걸음일 뿐이다. 이 준비를 위한 첫걸음에 20년을 흘려보낸 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다. 첫걸음을 내딛을 줄은 알아도 두 번째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었다. 우리의 운동은 사상적으로는 철저히 순수해졌다. 그러나 현실 운동 측면에서 보면 20년 걸려 갓 첫걸음을 디뎠을 뿐, 두 번째 걸음을 디디는 것은 잊었다. 우리는 사상은 순수한 혁명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행에 있어서는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을 잊어버리는 보수주의자의 오류에 빠져 있었다.

  물론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전례 없는 역경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과 일본의 자본주의의 발달이 지연되었다는 사정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과거 우리의 잘못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다. 적어도 형세가 변한 오늘날과 미래에도 우리가 여전히 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오류를 계속 저지르는 것이다.

 

 

5. 노동조합 운동은 어떠한가

 

  무산계급 운동의 또 하나의 방면 ー 노동조합 운동 쪽은 어떨까.

  노동조합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은 어쨌든 노동계급 중 극소수의 운동이다. 물론 지금도 노동조합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보다 규모가 더 크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산계급의 정당[각주:4]은 정치에 대한 견해와 강령을 조건으로 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노동 계급의 전위인 사람들이 단결한 형태가 되지만, 노동조합은 모든 노동자를 산업적으로 포용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조직이다. 이렇게 노동조합 운동은 근본적으로 사회당보다 더 포용적이다. 이를 감안할 때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만큼이나 극히 소수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총 조합원 숫자도 이미 (무산계급의 수에 비해) 극소수이지만, 노동조합 운동의 중심을 이루고 실제 활동하는 분자는 더더욱 소수이다. 오늘날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이라기보다 소수의 노동 계급의 선각자 운동스러운 성격을 다분히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선각자는 양에 있어선 소수이지만, 선명한 계급의식을 갖고 철저히 순수한 사상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100년, 150년 역사를 가진 외국의 노동조합 운동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몇몇 노동계급의 선각자가 사상적으로 철저히 순화할수록 주변의 일반 조합원들과는 사상적, 행동적으로 상당히 거리가 생긴다. 거기에 노동계급 대중과는 더더욱 큰 거리가 생긴다.

  이렇게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은 아직은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선각자 혹은 소수의 전위의 운동이며, 노동조합은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위해 모인 단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많든 적든 사상적으로 결집한 무산계급의 정당 내지 사상 단체와 같은 특성들 또한 어느 정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것은 어째서일까. 말할 것도 없다. 무산계급 운동은 (특히 일본의 상황에서는) 우선 이러한 첫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계급의식의 여명에 닿은 노동계급의 소수자들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그러하였듯 먼저 자신을 명확히 돌아본 후 우선 노동조합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를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자본주의 사상과 심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전속력으로 사상적으로 철저히 정제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준비 없이 진정으로 심도 깊은 노동조합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수이긴 하지만 진실하고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순수한 무산계급의 사상과 견해에 입각한 노동 계급의 전위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무산계급 운동이 탄생한다.

  이것은 무산계급 운동의 첫걸음이었다.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은 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훌륭히 내디뎠다.

  그러나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이 만약 이 첫걸음을 내디딘 채 같은 장소에만 머무른다면, 만약 이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즉시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것을 잊는다면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도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빠졌던 오류와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6. 우리의 새로운 표어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 ー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ー 의 첫걸음은 우선 무산계급의 소수의 전위가 자신들이 나아갈 목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이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다음 두 번째 걸음에서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무산계급 대중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산계급의 소수의 전위는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먼저 사상적으로 철저히 순화했다. 그러기 위해 소수의 전위는 본대인 대중을 훨씬 뒤에 남겨둔 채 앞으로 진출했다. 이제 전위는 적에 의해 본대와 차단당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대중을 끌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무산계급 운동의 두 번째 걸음은 이러한 소수의 전위가 철저하고 정제된 사상을 지닌 채 훨씬 뒤에 남겨진 대중 속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또 무산계급 운동의 첫걸음은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 아래에 있는 혼돈의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독립한 무산계급의 입장을 갖고 다시 대중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산계급 운동의 두 번째 단계이다. "대중 속으로!"라는 표어는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의 새로운 표어여야 한다.

  이 새로운 표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 ー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ー 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7. 대중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산계급 운동의 제1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상을 정제하고 무산계급 운동 이후의 목표를 명확하게 세우는 일을 가장 큰 의미로 삼았다. 그랬기에 우리는 '행동'이 가지는 효과를 충분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산계급 운동이 제2기에 들어감과 동시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목표를 한층 분명하게 인지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산계급 대중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운동은 이런 대중의 당면 요구에 입각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철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철폐 미만의 어떠한 개선도 결코 우리를 해방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무산계급의 대중이 자본주의의 철폐를 요구하지 않고, 현실의 눈앞의 생활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당면 운동은 대중의 현실의 요구에 기초해야만 한다. 우리는 생산이 생산자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노동자 계급 대중이 아직 생산의 통제를 요구하지 않고 당장 하루 10전(錢)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당면 운동은 이런 대중의 실제 요구에 입각해야만 한다. 우리의 운동은 대중의 당장의 요구 위에 있어야 하고, 대중의 당장의 요구로부터 힘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혁명주의로부터 개량주의로 향하는 타락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대중의 행동과 분리된다면 혁명적 행동은 있을 수 없고, 대중의 현실의 요구와 분리된다면 대중 운동은 없기 때문이다. 혁명주의와 개량주의가 갈라지는 지점은 우리가 일상 운동과 당면 운동에서 대중의 실제 요구에 양보할지 양보하지 말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실제 운동과 투쟁 속에서 대중의 요구들을 점점 늘리고, 최종 목표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지에 아닌지에 있다.

  적에게 비타협적이기 위해 대중의 실제 요구와 타협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히 무산계급 대중의 즉각적인 이해를 대표하는 운동, 당면의 삶을 개선하는 운동, 부분적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을 지금보다 더 중요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운동은 현실화되어야 한다. 

 

 

8. 정치의 부정과 정치적 대항

 

 따라서 무산계급 운동은 결코 부르주아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치가 부르주아의 지배를 의미하는 한 민중의 생활은 정치에서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가 공장에서 악전고투하여 겨우 10%의 임금 인상에 성공하더라도 부르주아들이 조세 방법에 조금 손을 대거나, 금리 정책으로 물가를 약간만 올리기만 해도 양보받은 양의 두세 배를 노동자로부터 되찾을 수 있다. 이리하여 노동계급이 경제전선에서 얻은 승리는 무산계급이 정치에 무관심한 이상 정치전선에서 거의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에 의해 무효가 되어버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수입이 어떤 세금으로 징수되고, 그리고 어떻게 배분될지는 결코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놀음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통절한 이해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해군 축소 때문에 생긴 잉여금이 영업세 인하를 위해 사용되는지, 아니면 실업 방지를 위해 쓰이는지 여부는 임금이 인상과 인하 문제만큼이나 노동자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이 잉여금이 교육비로 쓰인다 해도, 고등학교 증설에 사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초등학교 학용품과 음식 지급을 위해 쓰이는지는 무산계급의 이해와 직접 관련이 있다. 오늘날의 정치는 민중의 (경제) 생활과 동떨어진 정치이다. 정치를 더욱 민중의 생활에 밀접하게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무산계급의 (경제)생활과 동떨어진 정치가 있을 수 있을까. 정부가 의회에 제출하고 부르주아 대표자가 협찬하는 수십 억의 예산 중 한 푼이라도 궁극적으로 생산자인 무산계급의 생활과 관련 없는 것이 있을까. 부르주아 정치는 항상 무산계급의 생활과 접해있다. 단지에 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다년간의 착취 때문에 털끝까지 뜯겨 빨간 상처투성이가 된 무산계급의 생활에 잔혹하게 접해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부는 부르주아 정부이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라고. 그렇다. 우리는 정부로부터 어떤 것도 받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정부에 요구 ー호소가 아니다ー 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바라는 것,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르주아 정부로부터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내야 한다. 허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부는 부르주아 정부이다. 무산계급은 그저 그들의 정치를 고스란히 부인해야 한다,라고. 이것은 마치 '파리는 더러운 벌레이다. 우리는 단지 파리를 절멸하면 된다. 우리는 이 더러운 벌레를 상대하지 않는다. 이 더러운 벌레를 상대하는 것은 곧 이 더러운 벌레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더러운 벌레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지금 머리에 앉은 더러운 벌레를 쫓아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저 그냥 머릿속에서 그들을 부인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우리 머리 위에 마음대로 오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현재의 정치는 부르주아의 지배임에도 불구하고 ー아니, 오히려 부르주아의 지배이기 때문에ー 이 부르주아 지배 형태인 정치가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고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 직접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 이상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를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부르주아 정치를 단순히 소극적으로 부정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정치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사상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결코 부르주아의 지배와 적극적으로 싸우는 길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투쟁이다. 부르주아 정치와 투쟁하지 않는 자는 부르주아 정치를 돕는 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적어도 부르주아 권력과 지배가 나타나는 곳에서 어떠한 방면이든 어떠한 전선이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정치의 전선은 부르주아의 지배와 권력이 가장 노골적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만약 무산계급 운동이 부르주아 정치를 단지 사상으로 부정하고 일체의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정치 전선의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현재의 제도를 사상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현 제도에 이쑤시개 끝을 쑤신 정도의 흠집도 낼 수 없다. 만약 무산계급이 진정으로 부르주아 정치를 부정한다면, 단순히 소극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와 싸워야만 하고 부르주아 정치와 대립되는 무산계급의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최근 일본의 노동조합 운동의 경향은 이런 점에 있어 현저히 바뀌어왔다. 올해 노동절 표어 중 하나는 노농 러시아를 승인하라는 요구였다. 이는 명백히 노동 계급의 정치적 요구이다. 생활권의 요구이든, 실업 문제 해결 요구이든, 또는 최근의 과격 법안 반대 요구이든, 이들은 모두 국가에 대한 노동 계급의 요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요구이고 따라서 무산계급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9. 전선의 방향 전환

 

  우리의 첫걸음은 무산계급 운동의 최종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해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정제되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 혁명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혁명주의자는 아직 대중을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혁명주의자이며, 대중과 함께 일할 줄 모르는 혁명주의자였다. 혁명 사상을 알지만 혁명운동을 모르는 혁명주의자였다.

  그렇기에 우리의 두 번째 걸음에서는 이 목표와 사상 위에서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대중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길은 우리의 당면 운동이 대중의 실제 요구와 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목표와 사상 위에서 대중을 움직이고 대중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혁명) 사상이 ××(혁명) 운동이 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것도 시시하고 저것도 시시하다'는 식의 소극적, 회피적, 회의적, 허무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 전투적, 현실적으로 변해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자본주의의 지배와 권력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전선에서 노동계급과 대중의 현실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체의 문제들을 단순히 부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태도로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일본 무산계급 운동 전선에서 이뤄져야만 하는 방향 전환이다. 일본 무산계급 운동은 소수정예 혁명적 전위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일본 무산계급 운동의 첫걸음이다. 일본 무산계급 운동은 대중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것이 일본 무산계급 운동의 두 번째 걸음이다.

  '대중 속으로!'.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 하에 있는 대중 속으로 분해되어 흩어져 버려선 안된다. 우리가 겨우 내디딘 첫걸음을 포기하고 소수의 전위가 대중 속에서 분해되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산계급 운동의 일보 전진이 아니라 혁명주의의 개량주의와 기회주의로의 타락일 것이다.

  1.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 문건에선 혁명을 ××라고 표기함. -역자 주 [본문으로]
  2. 이 논문이 제출되어 게재된 1922년 당시에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산 정당이 설립되기 이전이었다. 야마카와는 사회주의적 (합법) 무산계급 정당 운동을 하는 정당을 통틀어 사회당이라고 일컫었거나, 혹은 이 글을 원문 그대로 게재했다고 주장한 사회주의협회에서 원문에 없던 단어를 추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역자 주 [본문으로]
  3. 이 한 마디는 불행히도 훗날 여러 가지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무산계급 운동의 반대자들은 이 한마디를 사회주의자의 "참회"이며 "반성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과거는 죄다 "오류"이며, 여기서 사회주의자가 스스로 오류를 승인하고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올바른 궤도 내지는 올바른 지도 ー개량주의의 궤도 내지는 소부르주아 진보주의의 지도?ー 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 무산계급 운동에 동감하는 사람들 내지는 무산계급 운동 진영 내부에서조차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의 과거는 모조리 오류이며, 그러므로 의식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방향 전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무산계급 운동의 한 병졸로서, 한 개인으로서 끊임없이 오류를 범하고 끊임없이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몇 명이 요구하든 나는 기꺼이 내 오류를 승인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무산계급 운동이 전체적으로 ー그동안 많은 오류가 있었다고 한다고 한들ー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던 것이며, 따라서 오늘까지 쌓아 올린 일체를 버리고, 전혀 다른 길을 밟으며 ー예를 들면 소부르주아 자유주의 운동부터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에는 결코 승복할 수 없다.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한 독자에겐 내가 '우리는 그릇돼있었다'라고 한 의미가 보다 명백하리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4.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아직 무산계급의 정당으로 발전해 있지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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