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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니혼대˙도쿄대 투쟁 50년 1장 니혼대 투쟁 ① 본문
*본 번역은 2018년 12월 발간된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중핵파)'의 학생조직인 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의 기관지 '중핵' 복간 4호 「日大・東大闘争50年 ー21世紀学生運動の爆発を!」를 번역한 글입니다.
-역자 주
(1) '68년 9.30' 료고쿠 강당 대중 단체교섭
'물러나기로 결의했습니다' - 니혼대학 회장 후루타 쥬지로가 이렇게 발언한 순간, 니혼대학 료고쿠 강당 안은 열렬한 박수갈채가 일었고, 들썩였고, 잘게 썬 색종이들이 휘날렸다. 니혼대학 10만 학생이 반동 대학 당국에 완전히 승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68년 9월 30일, 료고쿠의 니혼대학 대강당에는 수만 명의 니혼대생들이 결집했고, 그 압력으로 강당이 흔들릴 정도였다. 경찰권력은 참가자 수를 축소 발표했고, TV, 신문 등 대형 언론들은 1만 명, 1만 5천 명, 2만 명 등 멋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론 그 정도밖에 되진 않았다.
'과거 창가학회청년부 집회에 2만 5천 명을 료고쿠 대강당에서 수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일 9월 30일은, 1층 의자의 태반이 치워져 있었고, 니혼대생 제군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맨바닥에 앉았고, 2층, 3층, 4층에 몰려든 학생들의 무게로 4층의 벽에 금이 갔었고, 연단에서는 두 번 세 번 마이크로 주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시간상 도중에 퇴장한 학생, 도중에 새로 참가한 학생 등을 감안하면 인원은 거진 3만 명을 넘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다. 경비 등의 이유로 뛰어다니고 있던 학생 중 하나는 5만 명이라는 숫자마저 이야기했다. 적어도, 도쿄에 있던 니혼대생의 과반이 이 대중 단체교섭에 출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학식, 졸업식에조차 기껏해야 5천, 6천 명 모여도 많이 모인 니혼대학에서, 과거 한 번에 이 정도의 학생이, 심지어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모여들었던 그 의지의 표시를 대체, 누가 조직해 냈단 말인가.'(니혼대 전공투 편 '바리케이드에 건 청춘' 12p. 이하 '청춘') 1
니혼대학 전공투회의(전공투)는, 이 대중 단체교섭은 오후 3시부터 익일 오전 3시까지 열렸고, 3만 5천 명이 참가했다고 기록한다.
대중 단체교섭에서의 후루타 회장의 확약사항은 이하와 같다.
1. 저는 6월 11일, 경제학부에 대해 일부 체육회, 폭력학생, 폭력단체를 동원해 학문의 장을 폭력의 장으로 유린하여 학원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더해 탄압을 행한 일을 철저하게 자기비판합니다.
2. 8월 4일 대중 단체교섭을 진행하기로 7월 20일 명확하게 확약서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니혼대 모든 학생의 진의를 유린하고, 대중 단체교섭의 석상에 출석하지 않은 점을, 더불어 무기한 연기했던 점을 자기비판합니다.
3. 9월 4일 가처분 집행, 기동대 학내 진입에 대해, 그 행위 자체가 틀렸다는 점을 인정하고, 책임을 느끼며 자기비판합니다. 더불어 제 교육자, 학자로서의 자세에 문제가 있던 점을 철저하게 자기비판합니다.
하지만, 후루타 회장은 '퇴진의 의지를 굳혔다'라고 말하면서도, 이사회 총퇴진의 결의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고, 다시 한번 단체교섭을 10월 3일에 니혼대 료고쿠 강당에서 이어나가기로 확약하며 단체교섭은 끝났다.
단체교섭의 마지막에 모든 참가자가 일어나 슈프레히콜을 진행했고,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했다. <10.3 대중 단체교섭에서 승리하자! 후루타 체제를 타도하자! 이사회는 총 퇴진하라! 승리하자!> 2
과거, 일본 학생운동에서 이 정도의 대중적 에너지가 폭발한 적이 있었을까. 일본 학원 투쟁사 사상 최대, 최고의 투쟁이라 불리는 '니혼대 투쟁'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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