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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니혼대˙도쿄대 투쟁 50년 1장 니혼대 투쟁 ② 본문
*본 번역은 2018년 12월 발간된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중핵파)'의 학생조직인 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의 기관지 '중핵' 복간 4호 「日大・東大闘争50年 ー21世紀学生運動の爆発を!」를 번역한 글입니다.
-역자 주
(2) 니혼대 투쟁 전사(前史)
'1968년'에 이르기까지 니혼대생의 투쟁을 돌아보고자 한다. 전후 혁명기, 니혼대 학생운동은 전국 학생운동 중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45년 12월의 도쿄 도내 학생 연락 회의(東京都下学生連絡会議)에선 도쿄대나 와세다대와 더불어 니혼대학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 파도는, 1948년 가을부터 수업료 인상과 학생운동의 지도부 탄압에 반대하는 니혼대 미시마 캠퍼스에서의 '미시마 반파쇼 투쟁'에서 폭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퇴학처분의 남발(21명), 그리고 1949년의 반 일스 투쟁 의 패배로, 니혼대 학생운동은 침체기에 들어간다. 1
1956년 재일 미군기지 확장 저지의 첫 투쟁인 스나가와 투쟁에서는, 니혼대생 250명이 현지 투쟁에 궐기했다. 이에 대해 니혼대 당국은 1957년 '합리화 개선안'을 발표하고, 니혼대는 다른 사학보다 앞서 '산학 협력 노선'에 박차를 가했다. 매머드 대학='대량생산화', 즉 학생의 양산적 육성, 문과계를 중심으로 한 니혼대를 1950년대 고속성장 아래에서 산업자본의 요구에 따라 이과계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당장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학생을 각 학부로부터 분산시키고, 철저한 억압과 폭력적 지배를 관철시켰다. 니혼대는 '주식회사 니혼대학'이 되었고, 일본 제국주의의 '모델 학교'가 되었다. 니혼대의 수입액은 1959년 약 37억 엔으로부터 1967년 약 266억 엔으로, 9년간 7배로 늘어난다.
이에, 경제학부 2부생(야간부)이 반격을 가했다. 1957년 10월, 경제2부 학우회는 전학련 가맹을 결정하고, '합리화 개선안과 경직법 반대'를 위한 파업에 돌입한다. 니혼대 당국은 이 파업에 7명을 퇴학 처분하는 것으로 응답했고, 2부생의 투쟁은 전학련 가맹으로부터 거의 1년간 맥이 끊기게 된다. 1959년에는 요시다 주지로가 총장에 취임한다. 2
그럼에도 니혼대생들은 1960년 안보 투쟁 최후반(6월 18일)에서 총리 관저 앞에 1500명의 부대로 결집했다. 1962년~1963년에는 '니혼대 수학과 사건'이 일어난다. 1962년 11월, 문리학부 수학과 후쿠토미 세츠오(조교수), 기노시타 모토오(조교수), 긴바야시 코오(전임강사), 구라타 레이지로(전임강사)의 4명이 '니혼대의 사상에 맞지 않으니 내년 3월까지 사표를 내라'라며 사임을 강요받았다. 1965년 6월에는 한일 기본조약 저지 투쟁 집회에 참가한 니혼대생 와이다 시로 군이 기동대의 폭행으로 사망한다.
철저한 폭력적 탄압에 의한 학내 지배에 대한 분노가 높아지는 가운데, '경제학부 1967년 4.20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1968년 니혼대 투쟁의 도화선이 된다. 4월 20일은 경제학부 신입생 환영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역사학자 하니 고로씨의 강연 '나의 대학론'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대학) 당국은 '학생증 검사'로 타 학부생의 입장을 거부하는 한편, 뒷문으론 타 학부인 체육계 학생을 입장시켰다. 회장은 400명의 폭력학생에 의해 점거당했고, 하니 씨가 단상에 오르자 회장은 조롱과 분노의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익 학생은 경제학부 학생회 집행부에게 2시간에 걸쳐 철저한 린치를 가했다.
니혼대 당국은 다음날 21일, '학생 집회와 단체활동 금지'란 고지를 내고, 5월 1일엔 집행부 전원을 징계한다. 그러나, 투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1967년 10.8 '사토 총리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하네다 투쟁에서, 나카무라 미치루 군, 이오카와 이사오 군 등 2명의 니혼대생이 '교토대생 야마자키 히로아키 군 폭행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일이다. 두 명은 즉시 퇴학 처분이 되었지만, '니혼대생의 대응은 과거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 격렬한 투쟁에, 심지어 니혼대생이 선두에! 놀람은 공감으로, 그리고 심정적, 동지적 연대감으로 깊어져 간다.' '하네다 - 제2의 하네다 - 사세보 - 산리즈카 3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적인 투쟁 속에서, 니혼대생도 결코 혼자 뒤에 남겨지지 않았었다.' ('대학 점거의 사상' 37페이지. 이하 '사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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