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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대・도쿄대 투쟁 50년 - 제2장 도쿄대 투쟁 본문

일본 좌파 운동 번역/중핵파

니혼대・도쿄대 투쟁 50년 - 제2장 도쿄대 투쟁

0079char 2021. 3. 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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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앞 전공투. 출처 月刊『国際労働運動』

본 글은 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중핵파 학생조직) 발간 '니혼대-도쿄대 투쟁 50년'에 실린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역자 주

1. ‘10월 8일 하네다’의 도쿄대로의 파급

 

 ‘1967년 11월 11일 심야, 고요한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안에 예고도 없이 헬멧에 게바봉[각주:1]을 든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랑비 속에서도 형형색색의 헬멧들이 대열을 지어 차례차례 캠퍼스로 들어왔고 12일 오전 2시에는 2천 명에 달했다. 제1 본관 앞에서 정문에 걸친 광장은 스크럼을 짜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학생들로 넘쳤고, 어둠 속은 이상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12일 사토 수상 방미를 저지하기 위해 10월 8일에 이어 다시 하네다공항 현지 투쟁에 전국적으로 집결한 학생들…3파계 전학련(사청동 해방파, 사청동, 마르학동중핵파) 대부분이 츄오대학에서 총괄 집회를 끝내고 숙박할 장소로 마침 고마바제[각주:2]를 개최하고 있던 고마바 캠퍼스를 선택한 것이다. …대학 당국은 허를 찔려 당황한 채 교직원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12시가 지나 오오코우치大河内총장이 도착하자 교직원들은 학부장실에 모여 “대책”을 의논한 끝에 “외부인은 즉시 전원 퇴거할 것을 명한다”라는 고시를 붙였다.’

 ‘날이 밝았다. 자고 일어난 자리를 깨끗하게 정돈한 “점거” 학생들은 7시경부터 다시 제1본관 앞에 집결해 10시가 지나도록 각파별로 나뉘어 집회하고 데모하기를 반복했다…이른 아침부터 등교한 많은 도쿄대생은 간헐적으로 내리는 빗속에 혼란스럽게 무장한 학생의 무리를 눈앞에 두고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었다. 집회에 참가하고 데모 대열 후미에 붙는 자, 제1본관 앞에 피켓을 붙이고 “고마바제를 지키자, 폭력 학생은 돌아가라”라는 구호를 반복하는 교양학부 자치회의 무리에 동참하는 자, 그리고 나머지 한 그룹인 대다수 “일반 학생”들은 이 두 흐름에 뛰어들 결단을 갖지 못하고 헬멧을 쓴 차림의 학생들로부터 떨어져 집회를 바라보기만 했다’

 ‘많은 교양학부 소속 도쿄대생들은 10월 8일 교토대생 야마사키 히로하키山崎博昭의 죽음과 사토 총리의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투쟁을 보며 평온하고 아늑한 일상이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실력 행동에는 주저하고 고마바 캠퍼스는 성역이라 생각하며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만으로 가득찬 언론의 행태, 캠퍼스 밖에서 찾아온 실력 행동이 가진 에너지와 긴장감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이 긴장의 일부를 어떠한 형태로든 떠맡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상황이었음은 사실이었다. 이 광경을 본 경험이 훗날 어떻게 분출되는가…’(“굴욕의 매장” 3~4p)

 

 1967년 10월 8일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과 일본제국주의의 베트남전 참전을 분쇄하기 위한 하네다 투쟁이 벌어졌다. 헬멧과 각목으로 무장한 전학련의 시위대는 하네다 벤텐바시 위에서 기동대와 격돌한다. 공포에 질린 기동대는 경찰봉을 난타해 시위 참가자 야마자키 히로아키를 학살했다. 전학련의 목숨을 건 궐기는 큰 울림을 전국, 전 세계에 일으켰다. ‘전학련을 지지할 것인가, 지지하지 않을 것인가?’-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이런 상황은 일본제국주의의 중추인 도쿄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1월 12일 ‘제2차 하네다 투쟁’ 직전 도쿄대생은 집단적으로 전학련에 접촉했다. 11.12 투쟁에는 ‘제1의 하네다’를 넘는 1만여 명이 대결집한다. ‘68~69년 도쿄대 투쟁’의 맹아는 이미 그 이전 해부터 있었다.

 

2. 발단: 의학부 투쟁

 

 1968년 1월 29일 도쿄대 의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한다. 2월 19~20일에는 의학부 ‘春見사건’이 일어난다. 여기에 관련해 3월 11일 17명의 학생, 연구생, 연수생에게 퇴학, 정학 등 중징계가 내려진다. 이것이 도쿄대 투쟁의 발단이 된다.

 6년제 의학교육을 마치고 졸업 후에 국가시험에 통과한 자는 1년간 인턴으로서 의국에서 일할 의무가 있었다. ‘무급의국원’, ‘연수생’이라고도 불리는 인턴제도는 열악한 조건의 저임금 노동이었다. 인턴제도는 청년 의사를 한번 쓰고 버리는 체제이자 병원 영리주의의 상징이었다. 1965년부터 인턴제도에 반대하는 의대생 운동이 시작되었고 67년 3월 전국에서 87.4%의 의대생이 국가시험을 보이콧하는 장렬한 투쟁도 조직되었다. 젊은 의사들은 졸업 연도별로 ‘청년 의사 연합’(청의련)을 결성하여 투쟁했다.

 의대생의 투쟁으로 후생성은 인턴제도 대신 ‘등록의 제도’라는 연수제도를 제시한다. 의학부 졸업 후 국가시험을 친 후 2년으로 연장된 유급 연수 기간을 거치게 되었고, 기존에 대학병원에서만 이뤄지던 연수를 시중병원으로 확대했다. 연수의 갈라치기, 청의련 약화, 저임금으로 부족한 의료노동자 확충 등을 의도한 ‘등록의 제도’에 청년 의사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진짜 필요한 연수를 받을 수 없다’라며 반대했다. ‘의학부의 투쟁은 후생성과 도쿄대 의학부가 추진하는 의료영리화에 대한 투쟁이며 본질적으로는 일본의 의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후생성, 의학부 교수회와 의대생, 청의련이 반목한 투쟁이었다’(야마모토 요시타카 “나의 1960년대”)

 

 의학부 4학년 자치회와 66년, 67년 졸업자 청의련, 68년 졸업예정자 등은 ‘전학 투쟁 위원회’(전학투)를 조직하고 파업을 강행했다. ‘春見사건’은 2월 19일 우에다上田英雄 병원장에 대한 학생들의 회담 요구에서 시작됐다. 대화를 요구하는 학생들로부터 우에다는 도망쳤고, 春見 의국장을 비롯한 병원장의 추종자들이 학생들에 폭행을 가했다. 우에다가 도망친 것에 분노한 학생과 연수의들은 밤새도록 春見 의국원에게 그가 저지른 폭행을 추궁하며 자기비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의학부 당국은 돌연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3월 11일 17명을 징계처분했다. 이는 도쿄대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징계이며 징계처분자들의 의사로서의 장래를 말살하는 심각한 처분이었다. 게다가 징계처분자 중에는 당일 현장에 없었던 粒良군(67년 진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3월 28일 의학부 파업에 찬동하는 학생 간부들에 의해 졸업식 분쇄 투쟁이 조직되었다. 도쿄대생은 전날부터 야스다 강당 앞에 가부좌를 틀고 버티며 졸업식을 중단시켰다. 4월 12일 입학식에서는 학생들이 야스다 강당 앞에서 피켓팅을 벌이는 틈을 타 총동원된 대학 당국이 뒷문을 통해 大河内총장을 입장시킨 끝에 간신히 식을 치를 수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의학부 4학년과 65년부터 68년까지의 청의련, 합계 8세대가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투쟁은 ‘의학부의 특수한 문제라 생각되어 다른 학부에서는 별로 화제가 되지 않았다’, ‘3월에 징계처분이 나왔을 때도 전학적으로 큰 관심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나의 1960년대”). 투쟁을 적대시하는 일본 공산당계의 자치회 중앙위원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3. 전학적 투쟁과 도쿄대 전공투 결성

 

 도쿄대 의학부의 청년 의사 4개 세대를 포함한 장기간의 전례 없는 강력한 투쟁에도 대학 당국은 협박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가운데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는 방침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투쟁의 ‘막다른 길’을 타개하기 위해서 도쿄대 당국에 타격을 가하는 실력투쟁이 필요했다. 5월 말에는 니혼대 투쟁이 터지며 니혼대 전공투가 결성되어갔다.

 1960년 안보 투쟁 기념일인 6월 15일을 기점으로 전학투 70인은 야스다 강당 봉쇄를 결정하고 강행했다. 경악한 도쿄대 당국은 즉시 경찰에 출동을 요청했고, 17일 오전 4시에 기동대가 혼고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은 스스로 야스다 강당에서 퇴거했다.

  야스다 강당 앞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행진하는 기동대 1,200명의 모습은 도쿄대생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유로운 학부 도쿄대’의 환상은 깨졌다. 17일 오전에는 大河内총장이 ‘기동대 투입에 관한 대학 고시’를 발표했지만, 그 공허한 내용이 학생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17일 낮 야스다 강당 앞에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고 그 장소에서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전학 투쟁 연합’(전투련)이 결성되었다.

도쿄대 전공투 야마모토 요시타카 의장

 전투련 대표에는 야마모토 요시타카(이학 대학원)가 취임했다. 훗날 야스다 강당 사수전에서 도쿄대생 행동대장이 되는 시마 타이조우(이학부)는 야마모토의 인상을 ‘마르고 키가 크고, 연설을 참 못해 듣는 사람들이 안타까워질 정도였지만 신기하게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청년이었다’(“야스다 강당 1968-1969”)라고 기록한다. 60년 도쿄대에 입학한 야마모토는 60년 안보 투쟁 이래의 투쟁 경험이 있었다. 62년 대학 관리법 분쇄 투쟁이 벌어지던 11월 30일 야스다 강당 앞에서 5천 명 넘는 인원이 참가한 전도쿄 학생집회가 벌어진다. 그 직후 12월 ‘카야 세이지 총장 감금 사건’이 일어나 사이슈 사토루(도쿄대 투쟁에서 조교공투를 조직)가 정학 처분을 받고 야마모토도 경고 처분을 받게 된다. 야마모토는 66년 가을 ‘도쿄대 베트남 반전 회의’ 발족에 관여했고 67년엔 물리학회에 대한 미군 자금 유입 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 11월 12일 제2차 하네다 투쟁, 68년 1월~3월 오우지 투쟁(미군 야전 병원 개설 저지 투쟁)에도 참가했다.

 ‘학내의 분위기는 당국의 이 기동대 투입과 함께 한 순간에 바뀌었습니다’(“나의 1960년대”). 학내는 소란스러워졌고 각 학부도 자연스럽게 휴강했으며, 다음날에는 각 학부에서 학생대회가 열리고 파업이 결정됐다.

 

 6월 20일 법학부를 제외한 9개 학부가 일일 파업을 했고 1만 명이 야스다 강당 앞에서 벌어진 전학 총궐기 집회에 모였다. 이 정도의 규모는 60년 안보 투쟁이 최고로 고양됐던 ‘전학 자연 휴강’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집회는 총장에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대학 측은 거부했다.

 여기서 또 한번의 격진이 고마바에서 일어났다. 6월 16일 교양학부 자치회 정·부위원장 선거에서 프론트(구조개혁파)의 이마무라今村후보가 1,925표를 얻어 일본공산당계 후보(1,843표), 기타 후보(958표)를 제치고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긴 세월 도쿄대의 자치회 조직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공산당은 이 패배에 전율했다. 입학 후 1·2학년이 소속되는 교양학부의 자치회는 도쿄대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조직이다. 6월 20일 교양학부 학생투표에서 찬성 3,270표, 반대 1,301표, 기권 46표로 기동대 투입 항의 파업이 가결됐다. 고마바 캠퍼스 학생들은 정문에서 피켓팅을 진행하고 도쿄를 횡단해 야스다 강당 앞 집회로 대거 결집했다.

 6월 26일에는 문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며 바리케이드 봉쇄를 시작했다. 27일에는 경제학부 대학원이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전학적인 항의에 몰리자 大河内총장은 28일 학생과의 회담을 결정했다. ‘당국의 의도는 명확히 교양학부를 중심으로 한 무기한 파업을 미연에 방지하고 여름방학까지 시간을 끌어 도망치려는 속셈’(야마모토 “지성의 반란”)이었지만, ‘大河内총장의 회견은 도쿄대 전체를 끓게 하는 불씨가 되었다’(“야스다 강당 1968-1969”).

 회담이 이뤄진 야스다 강당에는 정원 3천 명이 가득 차 강당 앞까지 수천 명의 학생이 가득했다. 그러나 大河内총장은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마지막에는 도주해 모습을 감췄다. 전투련은 6.28 회견 직후 ‘강당 내 무기한집회’를 선언하고 ‘본부봉쇄실행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2백여 명의 본부봉쇄실행위원회가 사실상 도쿄대 전공투의 첫 일보입니다. 도쿄대 전공투는 학부생, 각 당파, 대학원생, 그리고 청의련의 공투 회의로써 시작되었습니다’(“나의 1960년대”).

 

 다음날 29일에 열린 각 학부의 학생대회에서 공학부, 법학부, 교육학부가 일일 파업을 결정했다. 7월 1일에는 약학부가 무기한 파업권을 확립했다. 야스다 강당=본부 재점거에 투쟁이 집중되었다. 7월 2일 밤 250명의 학생이 야스다 강당 재봉쇄에 궐기하고 모든 입구를 베니어합판과 책상으로 막았다. 본부봉쇄가 일어나자 ‘다음날부터 학교 전체에서 돌풍과 같은 토론이 벌어졌다.’(야마모토 “지성의 반란”).

 본부봉쇄는 ‘총장의 기만적 “소신 표명”과 그 이후의 도주에 대한 상향된 항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징계처분”과 “기동대 투입”은 우연히 벌어진 당국의 잘못된 행동이라서 우리가 항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도쿄대 총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립대학협회가 가진 노선이 현실에 관철된 형태이며, 그러한 대학 당국의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과 규제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대학 개편과 의료 합리화가 수행되고 있는 한 도쿄대 관리기구의 중추이며 국대협의 총본산인 도쿄대 시계탑을 점거하고 우리가 관리하고 강당을 모든 학생에게 해방시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만 징계처분부터 총장회담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과거 제국주의 국가 질서 속에 포함된 도쿄대학, 거기에 속한 교직원들의 손댈 도리 없는 퇴폐와 반인민적 본질에 대항한 투쟁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신들을 포함해 부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의해 보편적인 투쟁으로 발전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야마모토 “지성의 반란”). 그리고 그것은 ‘선행 부분이 자신들의 책임과 결의로 실력투쟁을 전개하고, 그 투쟁이 열어낸 상황을 대중적인 토의를 통해 상황을 공유하고, 그 투쟁의 승인을 쟁취해내는 운동의 스타일을 탄생시켰다’(“나의 1960년대”).

 7월 3일 공학부 학생대회는 ‘시계탑(야스다 강당) 봉쇄 지지’를 결의하고 교양학부 대의원대회는 압도적으로 봉쇄를 지지하는 무기한 파업을 결정했다. 5일의 교양학부 전학 투표에서도 찬성 2,632표, 반대 1,904표, 기권 333표로 무기한 파업이 결정되었다.

 

 니혼대 전공투보다 약 한 달 늦은 7월 5일 ‘도쿄대 투쟁 전학공투회의’(도쿄대 전공투)가 결성된다. 장소는 야스다 강당, 의장으로 야마모토가 선출되었다. “공투회의 뉴스” 1호(7월 18일)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쿄대 투쟁 공투회의는…7월 5일 3천 명의 집회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인된 전학의 공투 조직으로 학부생은 약학부를 제외하고 파업을 실행한 9개 학부, 전학투 등으로, 대학원생 및 연구생은 경제대학원 자치회, 신문연구원 자치회, 공학계, 전투련 등 4개 조직으로, 도합 13개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본부봉쇄에 결집해 전학적인 무기한 파업을 추구하고 투쟁의 진정한 승리를 바라는 전학적인 투쟁하는 공투 조직이다.’

 

 시마는 그것을 ‘도쿄대 전공투는 각 학부의 대표자와 각 당파 대표의 모임이었다. 각 당파의 소란스러운 주장들을 약간 더 나이가 많은 대학원생조직 “전학 투쟁 연합”이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학계 대학원의 야마모토는 차근차근 존재감을 늘려가고 있었다’(“야스다 강당 1968-1969”)라고 회상한다.

 재봉쇄 이후 야스다 강당은 ‘해방 강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7월 15일 도쿄대 전공투는 ‘1) 의학부 징계처분 철회, 2) 기동대 투입을 자기비판하고 기동대 투입 표명을 철회하라, 3) 청의련을 공식 승인하고 당국과의 협약단체로서 인정하라, 4) 문학부 부당처분철회, 5) 일체의 수사 협력(증인·증거 등)을 거부하라, 6) 1월 29일 이후의 전학적 사태에 관해서 일절 징계하지 말라, 7) 이상의 내용을 대중 단체교섭의 장에서 문서로써 확약하고 책임자는 책임지고 사임하라’를 ‘7개항 요구’로서 확정한다.

 

 여기서 일본공산당=민청(민주청년동맹)에 관해 알아보자. 투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민청은 일관되게 도쿄대생의 실력투쟁을 적대시했는데, 6월 20일 전학 집회부터 7월 5일 전공투가 결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6월 20일 집회에서 민청이 내건 “일부 학생에 의한 도발적 본부봉쇄규탄”이라는 종파주의적 슬로건은 분쇄되어갔다. …이날 이후 무원칙적으로 민청과 함께한 혼성 집회는 끝을 고한다.’

 ‘우리가 즉시 무기한 파업 돌입 방침을 제기한 것에 비해 일공·민청은 아직도 일일 파업만 반복하는 파상 파업과 교직원 조직화를 제기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들은 총장의 “소신 표명”과 관한 문제를 “통일된 의장단”을 만드는 문제로 몰래 바꿔치기하려 하고 있었다. 투쟁을 하든 말든 10개 학부별로 성원에 구색만 갖추면 그것이 “단결”이고 그러한 “단결”을 통해 단체교섭이 이뤄질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일일 파업을 고집한 배후에는 무기한 파업에서 만들어지는 학생 존재에 대한 부정의 사상, 그리고 그에 따라 형성되는 “투쟁하는 단결”이라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직도 파업을 자금 모금 운동의 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 등이 있었으며, 무기한 파업으로는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대중추수적 발상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우익적 사고에 따라 투쟁을 묶어두고 사유화하던 자치회 중앙위원회 헤게모니를 기를 쓰고 옹호하고 있었다.’

 야스다 강당 점거 시점에서 ‘대부분 학부에서 민청은 대중적으로 극복되었기에 주도권을 잃었었다.’ 이에 공포를 느낀 민청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전공투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적대시하고 반혁명적 무장 습격을 가하는 세력으로 전락해버린다.

 

4. 수습 책동을 넘어 투쟁은 계속된다

 

 전공투가 결성되며 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운동이 전학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그해 가을부터입니다. 각 학부가 교수회와 반목하며 교수회를 추궁했을 때 이에 대한 교수 개개인들의 대응이 너무 심했다는 점이 운동이 확산하는 계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의학부 이외의 학생 대중도 자신들 학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폐에 직면했습니다.’

 8월, 도쿄대 전공투는 강당에 숙박하며 야스다 강당이라는 요새를 유지했다. 도쿄대 당국은 6월~7월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8월 10일 ‘고시’를 발표했다. ‘고시’는 의학부 징계처분을 취소하며 일견 학생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동대를 투입한 책임을 학생에 전가하고 있었고, 일본 의료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묻는 의학부 파업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만적 ‘타협’ 자세로 투쟁의 조기 수습만을 노린 것이다. 야스다 강당 앞에는 곧바로 ‘거부’라는 두 글자만이 적힌 간판이 내걸렸다.

 8월 28일 의학부장의 단체교섭 거부에 도쿄대 전공투는 의학부 본관 봉쇄를 결정하고 실행한다. 도쿄대 아카몬(정문) 정면에 있는 의학부 본관은 도쿄대의 ‘권위’의 상징이자 ‘성역’이었다. 의학부 본관 봉쇄는 학내에 충격을 주게 된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중 야스다 강당 점거를 통해 이뤄지던 투쟁은 9월 개학과 동시에 각 학부에서 열린 학생대회에서 차례차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며 이어집니다.’ 9월 3일 고마바에서의 전학 총궐기 집회에는 1천 명이 결집한다. 7일 교양학부 대의원대회에서도 무기한 파업을 계속할 것을 확인한다.

 이 시기 일공의 도(都)학련 부대=‘새벽 행동대’가 처음 등장한다. 이것은 비공연 비밀조직=무장한 비공식 조직이었다. 9월 7일 이들은 도쿄대 병원 앞에 모인 새벽 행동대에 항의하는 전공투 학생들을 납이 든 목검으로 구타하여 머리를 깼다. 이후 약 150여 명의 새벽 행동대는 교양학부에 잠입하며 혼고 캠퍼스에 머물렀고, 일공 지도부는 도쿄대 앞 여관에서 투쟁 진압을 진두지휘했다.

 9월 11일 교양학부 기초과학과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고 16일에는 4,000여 명의 고마바 공투가 교양학부 사무실(1호관)을 봉쇄한다. 무기한 파업의 파장은 도쿄대 전체에 퍼졌다. 19일 공학부, 27일 경제학부, 28일 교양학부, 10월 2일 이학부, 3일 약학부와 농학부가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2일, 가장 난처해하던 법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며 10개 학부 모두가 파업 대열에 서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大河内집행부가 “최종 방침”이라 명한 “8월 10일 고시”는 완전히 파산되었다.’ 도쿄대의 모든 학부 무기한 파업은 개학 이후 첫 사태이자 니혼대 11개 학부 파업으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도쿄대 전공투는 10월 7일 고마바에서 3천 명 규모의 총궐기 집회를 개최하며 세를 과시했다.

 10월 니혼대, 도쿄대 투쟁을 날려버릴 정도의 큰 투쟁이 발생한다. 바로 10월 21일 벌어진 국제 반전데이 투쟁이다. ‘10월에는 모든 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는데, (당시 이 투쟁에 참가하기 위해) 도쿄대 혼고 캠퍼스에서만 3천 명 이상의 부대가 출격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고마바 캠퍼스도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규모로 데모에 나섰겠죠. 60년 안보 투쟁의 칸바 미치코[각주:3] 추모 시위를 제외한다면 이 정도 규모는 도쿄대 설립 이후 최초일 겁니다. 그것은 7월 이후 4개월에 걸친 도쿄대 전공투의 야스다 강당과 각 학부의 바리케이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투쟁, 바리케이드가 만들어낸 해방공간이 일상적인 투쟁 체제를 지탱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궐기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편으로는 저를 비롯한 사람들은 60년대 안보 투쟁과 67년부터의 베트남 반전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70년 안보 투쟁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중심적인 과제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었습니다.’ 학내에 등장한 3파 전학련을 보고 경악했던 도쿄대생들은 이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신쥬쿠 역에서의 미군 탱크 바퀴 수송 저지 실력투쟁에서는 학생과 노동자 수만 명이 기동대를 쫓아내고 신쥬쿠역을 점거하는 전례 없는 투쟁이 벌어졌다. 공포에 질린 권력은 소란죄를 적용해 이날 도쿄에서 736명이 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10월 21일 투쟁은 긴박한 정세 아래에서 봉쇄 투쟁을 하고 있던 니혼대 도쿄대 투쟁에 큰 전망을 부여했다.

 

 11월 1일 大河内총장과 모든 평의원의 사임이 발표되었고 총장 대행으로 가토 이치로 법학부장이 취임한다(4일). 大河内총장이 사임에 즈음해 발표한 “학생 제군에게”라는 성명에 분노한 전공투는 사임 당일 공학부 1호관 및 열품관(공학부 사무동)을 봉쇄하며 성명에 대답했다. ‘大河内 대신 68년 11월 가토가 총장인지 총장 대행인지에 취임하고 나서 대학 당국은 “대화”라던지 “대학개혁” 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지만, 의학부 교수회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책임을 지지도 않고, 문학부 교수회도 문학부의 학생에 대한 징계처분을 철회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 태세를 허물 수 없었습니다’(“나의 1960년대”).

 여기서 도쿄대 투쟁의 노선을 살펴보자.

 

5. ‘도쿄대 해체’와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 일본공산당과의 격돌

 

 ‘8월 2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각 학부에서 일련의 봉쇄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이야말로 도쿄대 투쟁이 단순히 날강도 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현재의 대학, 대학의 학문연구, 학문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현대의 사상, 그것을 짊어진 연구자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물질화해가는 과정의 투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비판은 부르주아 지배의 중추인 제국주의 대학, 즉 도쿄대학의 존립에 집중되며 ‘도쿄 제국주의 대학 해체’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도쿄대 해체”와 같은 슬로건…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입 밖으로 꺼낸 것은 9월 16일 의학부 단체교섭 석상에서 粒良군이 “이런 도쿄대라면 없는 게 낫다”라며 비통한 얼굴로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도쿄대 해체”를 입에 담은 것은 제국주의 일본 백 년의 역사에서 도쿄대학이 저지른 반인민적인 과거, 지금 존재하는 법인으로써의 도쿄대라는 사실 이전에, 현실의 국면 속에서 구역질이라는 교수들에게 받은 굴욕과 분노, 그러한 도쿄대의 일원인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 등이 발현된 것이다. “진리”나 “이성”이라는 언어로 위장하고 있어도 현실의 도쿄대학은 한 꺼풀 벗겨보면 이 땅에서 가장 썩은 정신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장소였다’(“지성”).

 다음으로 도쿄대 전공투의 정신을 반영하는 ‘도쿄대 투쟁에서 발행된 무수한 삐라 중 가장 우수한 것 중 하나’(“지성”)라 여겨지는 도시공학 대학원 파업 실정선부[각주:4]가 발행한 “연구자에게 있어 도쿄대 투쟁이란?”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격렬한 도쿄대 투쟁을 치르고 있다. 도쿄대 투쟁은 결코 단순히 대학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학문적 영위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고발로써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일상적 지평에서의 연구자로서의 규정 자체를 문제로 삼고 “우리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되묻고, 그것을 통해 역으로 “학문” 자체의 존립 기반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통해 실천되고 있다’.

 ‘학문 그 자체의 존립 기반을 문제시해야 할 때, 현실에서 동떨어진 학문 영역을 아무런 지장 없이 연구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카롭게 고발해온 인간적, 사회적 기반을 사상한 학문의 퇴폐형식 그 자체이다. 전학 봉쇄 투쟁이 구체적인 과제가 된 도쿄대 투쟁의 지금 단계에서 모든 연구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연구의 자유”라는 환상 아래 일상적 연구에 함몰된 <연구자>라는 방대한 존재는 위기에 처한 도쿄대의 체제를 지금도 지탱하고 있고 “8.10 고시” 노선의 관철=집행부 교체 연극과 새로운 수습 책동=학생과 대학원생, 연구생, 교직원의 투쟁이 압살당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모든 “연구자”들은 즉시 일상적 연구 활동을 보이콧하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존재, 모든 활동에 근본적이고 철저한 비판의 눈을 향하게 하라! 자신의 부당한 존립 기반을 자신의 손으로 매장해라!’(“파업실 뉴스” 13호, 68년 11월 12일).

 

 도쿄대 전공투는 11월 11일 당국과의 교섭을 중단하고 12일부터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 투쟁에 들어선다. 그 돌파구는 종합도서관봉쇄이다. ‘전공투는 투쟁의 초기부터 본부봉쇄->전학적 파업->전학적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투쟁 전망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전학적 바리케이드 봉쇄는 추후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만 이야기되고 있었는데, 이 시기를 경계로 비로소 현실적 과제로서 위치 지어지게 된다.’(“지성”)

 ‘우리에게 바리케이드를 통한 봉쇄 전술은 무기한 파업과 더불어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학생에게 있어 문부행정기구에 포섭되어 자본에 봉사하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인 대학, 대학을 통해 권력의 톱니바퀴가 될 운명을 가진 학생 존재에 대한 거부로써 바리케이드는 존재한다.…우리에게 있어 바리케이드는 패배하고 후퇴하던 과거에 대한 결별과 동시에 연구자로서 대학 권력의 가장 아래를 지탱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갖는다. …연구실 봉쇄, 그리고 교수를 내쫓고 연구실 자주 관리로 발전할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새로운 투쟁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바리케이드의 의미는 그것뿐이 아니다. 투쟁을 적대하는 폭력분자로부터의 방어에 그 첫 번째 의미가 있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도쿄대 투쟁의 경우 그 적대자는 다름 아닌 전위당을 자처하는 일공 민청이다. …니혼대의 투쟁이 거리로 나와 돌을 쥐고 국가권력과 대결하는 형태였고 바리케이드는 무장한 우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도쿄대 투쟁은 학원 내의 음습하고 일상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형태이고 바리케이드는 무장“좌익”과 대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너에 몰린 나머지 흉포하게 변한 일본공산당=민청은 전국에서 인원을 총동원해 전공투를 적대했다. 전공투도 전국의 학생과 노동자에 지원을 요청한다. 여기서부터 도쿄대 투쟁은 ‘전국적 투쟁’으로 전화하기 시작한다.

 ‘65년 이후 도쿄대 전학의 자치회를 반쯤 독점하고 있던 일공 민청은 여름방학에 전선으로부터의 도주한 이후 완전히 극복되고 파산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공학부와 경제학부에서는 민청 집행부가 소환되었고, 농학부 약학부에서도 전공투의 방침이 지지받아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고 민청에 사유화되어 있던 자치회 중앙위원회는 완전히 와해되었다’(“지성”)

 11월 10일 “아카하타”에 ‘당면한 대학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라는 일본공산당 중앙성명이 발표된다.

 ‘“아카하타 논문” 직후 11월 16일 도쿄대 민주화 행동위원회는 과거 내세웠던 “4개 항목”을 은근슬쩍 폐기하고 “신 4개 항목”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폭력 일소, 트로츠키주의자 추방이 요구항목으로써 포함되어 있었다’(“지성”). ‘당 중앙의 직접 지령으로 도쿄대 투쟁에 대한 개입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일 “아카하타”는 1면에 도쿄대 투쟁을 다루며 투쟁 그 자체를 비난하는 수준 낮은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을 뿌려대고 있었고, 활판 인쇄된 삐라가 학내에 뿌려졌다. 민청은 12일의 도서관 앞 게발트에 천 명의 무장 부대를 투입했고, 수백 명에서 천명쯤 되는 사람들을 교육학부에 상주시킴으로써 교육학부는 실질적으로 점거 봉쇄되었다. 교육학부 교수회는 그것을 사실상 승인했다. 민청은 도쿄대 혼고 캠퍼스 주변에 여관을 잡고 상시 천명 규모의 부대를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취했고 생협은 밥을 지었고,…’

11월 12일 종합도서관 앞에서 일본공산당 청년조직 민청과 충돌한 전공투. 좌측이 민청이다.

 봉쇄를 둘러싼 중요한 결정에서는 모두 게발트가 일어났다. 11월 12일 종합도서관 앞에서의 일어난 격돌에서 황색 헬멧을 쓴 새벽 행동대 5백 명이 참나무 목검을 휘두르며 각목을 든 전공투 부대를 ‘패주’시킨다. 같은 날 니혼대 예술학부가 1,500명의 기동대의 습격을 받고 46명이 체포된다. 도쿄대 투쟁과 니혼대 투쟁에서 국가권력과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폭력을 분쇄하는 것이 공통과제가 되었다.

 

6. 11월 22일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 전국 학생 총궐기 집회’

 

 가토 총장 대행은 취임 당일 ‘전학 집회’를 제안한다. 그것은 학생들의 지금까지의 요구는 大河内총장 사임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니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분쟁을 해결’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토 체제와 일제 사토 정부는 니혼대 투쟁에서는 투쟁을 전면적으로 압살하는 방침을 내세웠지만, 도쿄대 투쟁에서는 ‘회유’ 노선으로 투쟁하는 부분을 고립시켜 마지막에는 기동대 투입으로 종결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를 위해 일본공산당도 철저하게 이용했다.

 11월 18일 도쿄대 전공투와 가토 총장 대행 사이의 ‘공개 예비 절충’, 그리고 동시에 개최된 전 도쿄 총궐기 집회 때문에 야스다 강당 앞에는 8천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법문 1, 2호관과 공학부 옥상까지 사람이 꽉 찼다. 이 절충은 당연히 결렬되었고 가토는 ‘돌아가라, 돌아가라’는 함성 속에서 강당을 나온다.

 이 시기 혼고 캠퍼스에서는 연이어 학생대회가 열린다(19일 공학부, 20일 이학부 법학부 약학부, 21일 농학부). 가토 신체제의 ‘수습’노선이 이뤄지는 가운데 전학 봉쇄와 무기한 파업에 반대하는 조류가 강해졌지만, 강경 파업 유지파 또한 아직은 힘을 갖고 있었다.

 도쿄대 전공투는 니혼대 전공투와 함께 11월 22일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 전국 학생 총궐기 집회’를 호소하고 그 힘으로 일공과의 격돌에서 승리하고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에 돌입할 것을 결단한다. 전국의 투쟁하는 학생은 대거 도쿄대로 달려온다. ‘10월 21일 신쥬쿠 소란’으로부터 1개월, 투쟁의 물결은 급속하게 확대되어갔다.

 양 전공투의 공동호소문은 이렇게 선언한다.

 ‘인민의 미래를 건 해방의 투쟁은 의심할 것 없이 전 세계 학생의 힘으로 더욱 넓고 깊게 나아가게 된다. 프랑스의 “5월 혁명”에 …일본의 10.21 반전 반안보 투쟁에 붉은 실과 같이 이어져 있는 계급투쟁의 필연성은 지금 점점 강하게 일본 전국 학생의 일대 총궐기를 요청하고 있다. 격렬하게 폭발하는 전국 학원 투쟁의 양대 승부처인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의 깃발 아래 전국 학생의 총력을 한 점으로 결집하여, 은행나무 대집회에 3만 명이 압도적으로 대결집하여 이 요청에 용맹하게 응답해보지 않겠는가?’, ‘공투 회의의 투쟁에 패배하고 파산을 선고받은 일공 민청은 전국으로부터 게발트 부대를 투입해 선진적 학생의 무장해제와 바리케이드 파괴를 행함으로써 도쿄대 투쟁을 유산시켜 당파적 이익을 관철하고자 하고 있다. 도쿄대 투쟁의 승리는 이러한 곤란한 현 국면을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통해 단단히 투쟁해 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쟁취해낼 수 있다.’

 ‘도쿄대 투쟁, 니혼대 투쟁을 양 승부처로 하는 전국 학원 투쟁의 승리와 패배의 기로에 일본 전국 학생의 그리고 전 일본 인민의 미래가 걸려 있다. “대학 문제는 정치문제이다”라는 10월 1일 사토 총리의 발언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도쿄대 니혼대 투쟁을 투쟁하는 전국 학생의 모든 역량을 들여 승리해낸다면 연이어 전국 50여 대학 투쟁의 승리와 반전 반안보 투쟁들의 전망이 활짝 열릴 것이다. 도쿄대 은행나무 총궐기 집회는 다가올 인민과 학생의 총반격을 목표로 한다. 이제 이 집회를 통해 완전히 획기적인 학생 전선의 대통일이 실현되려 하고 있다. 국가권력의 탄압, 우익폭력의 도발, 일공과 민청의 반혁명적 대두 아래에서 투쟁은 극히 곤란에 처해있다. 안일한 연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진정한 결합은 투쟁 속에 존재한다. 지금 투쟁을 통해 대통일 집회가 쟁취되려 하고 있다.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의 깃발 아래 전국의 학생은 총궐기하라!’

 마침내 니혼대 투쟁과 도쿄대 투쟁은 합류한다. 도쿄대생은 니혼대 투쟁의 격렬한 ‘파괴의 사상’을 접한다. 야마모토는 그 감동을 회상한다.

 ‘진정한 의미의 “전공투”를 만들어낸 것은 니혼대입니다. 이건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1968년 6월 투쟁이 시작된 이후 짧은 시간 안에 학부째로 강력한 행동대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11개 학부가 각각 11개의 대학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거대한 대학의 전학적인 사령탑이 되는 정보국을 형성한 역량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니혼대 전공투만 데모를 해도 니혼대 경제학부 앞 三崎町 도로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으로 흔들렸는데, 니혼대 전공투는 단순히 그 압도적인 동원력이나 기동대, 무장 우익에 대항한 게발트에 있어 강했다는 점에서만 대단했던 것이 아닙니다. 니혼대 투쟁은 학생 대중의 정의감과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킨 투쟁이며 그 의미에서 과장 없이 전후 최대의 학생운동이고 최고의 학원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나의 1960년대”)

 11월 22일 2만 명을 결집시킨 도쿄대 전공투는 일공을 압도한다. 야스다 강당 앞 광장을 헬멧으로 가득 메운 이들은 니혼대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며 궐기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동대의 저지선에 의해 좀처럼 도착하지 않는 니혼대 부대 때문에 야스다 강당 중앙은 계속해서 비어 있었다’(“사상”).

 여기서 11월 22일의 클라이맥스가 등장한다. 도쿄대 전공투측 시마는 회상한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서치라이트가 광장을 비췄지만 모두가 단 하나의 대학 부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야스다 강당 앞에 모인 수천 명의 청년은 아득히 먼 울림 같은 것을 석양 저편에서 느꼈다. 그때 도쿄대 전공투 중 한 명이 마이크로 외쳤다. “학우 제군! 대열을 벌리기를 바란다. 지금, 니혼대 전공투의 투쟁하는 학우 3천 명이 기동대의 탄압을 뚫어내고 정문 앞에 도착했다!”

 떠들썩한 소란이 일어났다. 야스다 강당 앞 광장을 메우고 있던 모든 청년들이 길을 열어 은행나무 가로수길부터 강당 앞까지 니혼대 전공투를 위한 일렬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정면 자리를 둘러싸고 작은 다툼을 벌이고 있던 각 당파도 서둘러 길을 텄다.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리듯 인파가 갈라져 이들 무적 용사들이 지나갈 길을 열었다.

 三崎町의 니혼대학 경제학부 바리케이드를 출발해 무신고 데모를 강행한 니혼대 전공투 3천 명은 2천 명에 달하는 기동대의 벽을 뚫고 은색, 흑색, 적색, 청색, 백색 등 형형색색의 헬멧들의 행렬로 석양 속을 행진해 당당히 도쿄대 정문에 등장했다. 정문에서 야스다 강당의 정면으로 펄럭이며 앞서나가는 니혼대 전공투의 수십개의 깃발 뒤를 낮은 자세로 따라오는 니혼대 전공투의 데모대열은 압권이었다. “투쟁!”, “승리!”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3천 명의 스크럼이 은행나무를 지나 야스다 강당 정면의 니혼대 전공투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인파를 뚫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와 호령 아래 한동안 구호를 반복한 니혼대 전공투 부대는 야스다 강당 앞에 정지했고 광장은 발디딜 틈 없는 인파로 완전히 메워졌다. 이 니혼대 전공투의 대열을 보고있던 도쿄대 전공투 학생 중에는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었다.

 아키다 니혼대 전공투 의장은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음에도 이날 연단에 모습을 드러내 수만 명의 청년 앞에서 연설하기 시작했다’(“강당”)

 ‘22일 투쟁의 정치적 의의는 획기적이었다. 안보 투쟁 이후 처음으로 신좌익 조류들의 대통일 전선으로 결집한 헬멧 부대 2만여 명의 대집회는 학생운동 역사상 전에 없던 일이었고, 하네다 투쟁 이후의 학생운동 전진을 딛고 70년으로 향하는 투쟁의 큰 전망을 미리 엿볼 기회였다. 동시에 당 중앙의 직접 지령으로 전국에서 동원된 민청 게발트 부대와 싸우지 않고도 정치적으로 승리했다.’(“지성”)

야스다 강당 앞에서 열린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 전국 학생 총궐기 집회.

 12월 2일 가토 총장 대행은 ‘분쟁 해결안’(가토 제안)을 발표했고 일공은 이를 환영한다. 한편 도쿄대 전공투는 이것을 돌파한다. ‘도쿄대 투쟁이 시작된 문제는, …의학부 교수회가 후생성과 결탁하여 의사법의 개악을 진행하려 했던 점에 있었는데, “가토 제안”은 의학부 교수회라는 근원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갖습니다. 그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대학의 개혁” 따위를 말한다고 한들 그것은 그저 기만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나의 1960년대”) 그러나 가토 제안은 졸업, 진학, 입시를 내세워 학생 대중 속에 동요와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이래서는 3월 31일에 졸업, 진학은 어렵고 연내에 수업이 재개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입시 중지도 가능하다는 ‘유급 공갈’과 일체인 것이다.

 12월 2일 교육학부 학생대회, 4일 법학부 농학부 학생대회, 5일 이학부 학생대회는 파업 속행을 결정한다. 7일 공학부 학생대회는 ‘가토 제안’거부를 결의한다. 9일 약학부 학생대회, 10일 경제학부 학생대회도 파업 속행을 결정한다. 12일 문학부 학생대회는 ‘가토 제안’거부를 결의한다. 한편 학내 봉쇄도 확대된다. 이들 학생대회에서의 표결 수를 단순 종합한 시마는 당시의 학내 세력 비율을 ‘전공투계 33.9%’, ‘공산당계 27.6%’, ‘파업해제파 38.5%’라고 계산하고 있는데, 일공은 이런 구도를 이용해 파업 해제 세력과 야합해 도쿄대 투쟁 파괴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

 12월 23일 6백 명의 전공투 무장행동대가 법학부 연구실을 봉쇄하며 정문부터 야스다 강당에 이르는 은행나무 가로수길 건물은 모두 봉쇄되었다. 연내 수습 책동을 분쇄하는 가운데 ‘이듬해 초 기동대를 투입할 것’이란 소문이 돌며 학내 긴장이 높아져 간다.

 ‘69년 1월 대학 당국은 우리들의 투쟁을 힘으로, 즉 기동대의 폭력으로 짓이기려는 노선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 노선을 정당화하는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우리들의 투쟁에 일관되게 적대해온 사람들이나 애초에 투쟁과 관련이 없었고 빨리 투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이 사태에 있어 중요한 의학부와 문학부를 포함하지 않는 “7개 학부 대표단”이라는 단체, 그러니까 민청과 우파가 야합한 집단과 흥정한 것입니다.…우리는 그때까지의 투쟁의 정당성과 도의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국과 국가권력의 폭력적인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1969년 1월 18일, 19일의 야스다 강당을 중심으로 한 혼고 캠퍼스의 공방전이었습니다’(“나의 1960년대”)

 

7. 고마바 교양학부에서의 투쟁

 

 고마바 교양학부에서는 어떠했는가. 9월 16일 고마바 공투 400명이 교양학부 사무실(1호관)을 봉쇄한다. 이것은 고마바 캠퍼스에서 이뤄진 최초의 건물봉쇄이며 11월 이후의 전학 봉쇄의 선구였다.

 11월 14일 혼고 캠퍼스에서의 전학 봉쇄 투쟁 개시에 응하여 고마바 캠퍼스에서도 제3, 제6 본관 봉쇄가 시도되지만 민청 부대에 저지된다. 그러나 12월 1~2일 고마바 공투는 제8본관 봉쇄를 관철한다.

 12월 초 일련의 각 학부 학생대회가 성사된 후 교양학부의 동향에 이목이 쏠린다. 12월 11일 파업 중지를 위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라는 요구를 이마무라 위원장이 단호히 거절함에 따라 일공계 학생과 파업해제파 학생이 위원장이 농성 중인 제8본관 바리케이드를 공격했다. 고마바 공투는 전력으로 맞섰고 17명이 입원하는 대 난투가 벌어졌다. 13일 교양학부 ‘대의원대회’는 전학 집회 대표를 선출했다고 발표한다. 일공의 반혁명 테러의 비호 아래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그 회의의 결정을 ‘민주적’인 것이라 변명했다.

 ‘교양학부에서는 일공 민청과 우파는…단체로 제2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12월 13일 게발트 무장대를 대거 동원해 제2자치회의 대의원대회를 날조했다. 교수회는 제2자치회로 조직됐다. 캠퍼스 밖 기동대, 캠퍼스 안 교수 우익 민청의 게발트 무장의 보호 아래 가짜 대의원대회는 대표단을 선출했다.’(“지성”)

 13일 전공투의 총력투쟁이 벌어졌다. 오후 2시, 고마바 공투 부대는 날조된 ‘대의원대회’가 개최된 고마바 캠퍼스 기숙사 식당에 돌입했다. 식당에는 200여 명의 대의원밖에 없었고, 민청과 우익에 의한 허울뿐인 ‘대회’는 ‘대표단’선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할 뿐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8. 야스다 강당 사수 결전

 

 새해가 밝고 ‘피와 화염의 1월’이 시작된다. 1969년 1월 5일 도쿄대 전공투는 파업 해제를 위한 농학부 학생대회를 저지하기 위해 3개의 농학부 대강의실을 봉쇄한다. 8일에는 농학부 1호관을 봉쇄했고 농학부 운동장에서 벌어진 가토 총장 대행과 ‘7학부 대표단’의 집회를 견제했다. ‘7학부 대표단’이란 의학부, 문학부, 약학부를 제외한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이학부, 공학부, 농학부, 교양학부를 의미하는데, ‘대표’가 정규적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다룬 바와 같다.

 9일 교육학부 앞에서 전공투 부대와 일공 부대가 대 난투를 벌인다. 도쿄대 당국은 기동대를 투입하고 51명의 전공투만이 체포된다. 같은 날 밤, 당국은 ‘가령 대표단에 일부 이견이 있다고 해도 집회를 예정대로 치치부노미야 럭비장에서 10일 오전 0시반부터 개최한다’라 선언했다.

 10일 3천 명의 기동대의 보호 아래 도쿄대 투쟁 압살을 위한 ‘7학부 집회’가 치치부노미야 럭비장에서 개최되었다. 일공계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 집회에서는 ‘1. 의학부 징계처분 2. 문학부 징계처분 3. 추가 징계 4. 이후의 징계 제도 5. 경찰력 투입 6. 수사협력 7. 청의련 8. “8.10 고시” 9. 학생과 대학원생의 자치활동 10. 대학의 관리운영’이라는 ‘10개 항목’에 대한 승인이 이뤄졌는데, 전공투는 이것을 ‘학생의 항복 문서’라며 비판했다. 전공투는 회장 근처에서 항의 행동을 전개했고 149명이 체포되었다.

 10일 밤 전공투 부대 1,500명과 새벽 행동대 1,500명이 고마바에서 3시간 반에 걸쳐 정면충돌하며 고마바 기숙사를 둘러싸고 피의 사투가 벌어졌다. 다음날 11일 오전 고마바 기숙사 옥상에서 교양학부 ‘대의원대회’가 개최되어 ‘파업 해제 제안은 가결’되었음을 선언했다. 한편 혼고 캠퍼스에서는 10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일공계 부대가 야스다 강당을 습격하여 피칭머신으로 돌을 던져 강당의 모든 유리창을 깨뜨렸다.

 15일 야스다 강당 앞 노동자 학생 총궐기 집회에 5천 명이 결집했다. 결전에 대비해 은행나무 가로수길의 법학부 연구실, 열품실, 의학부 도서관, 그리고 야스다 강당의 바리케이드가 강화되었고 대량의 자재와 식품이 운송되었다. 기동대 투입을 앞두고 일공계 부대 전체가 16일까지 혼고 캠퍼스에서 퇴거했다.

 16일 가토 총장 대행은 경시청에 기동대 출동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17일 밤 혼고 캠퍼스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캠퍼스 안 각 건물에는 도쿄대 전공투와 지원 세력 등 학생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18일 오전 5시 45분 야스다 강당 시계탑 방송에서 ‘지금 기동대가 전부 출동했습니다. 모든 학우 제군은 전투 배치에 들어가십시오. 우리의 투쟁은 역사적, 인민적 투쟁입니다.’라는 방송이 송출됐다. 경시청은 8개 기동대 약 4,700명을 총동원했고, 예비대를 포함해 합계 8,500명이 출동했다. 휴대한 가스총은 5백 정, 가스탄은 1만 528발에 이른다. 기동대는 타츠오가문과 농학부 정문을 통해 캠퍼스 안으로 진입한다.

 사람을 조준한 가스총 수평사격은 금지되어 있지만, 기동대는 맹렬히 가스총으로 학생을 조준 사격했다. 7시 반 의학부 봉쇄가 해제된다. 8시 반부터 야스다 강당을 향한 공격이 시작된다. 경찰차가 물을 쏘았고 옥상과 시계탑에 있던 학생들은 1월의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냉수를 맞았다. 학생은 아래에 있던 경찰차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8시 50분부터 도쿄대 정문 왼쪽에 있던 열품관에, 10시부터 법문 2호관(문학부)에 공격이 시작됐다. 11시에 문학부, 13시에 열품관 봉쇄가 각각 해제되고 학생들은 전원 체포됐다. 오후 3시 반 봉쇄가 해제된 법학부 연구실에서는 167명이 체포됐다.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이때 혁마르가 자신의 범죄적 정체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혁마르 부대는 18일 결전 직전 적을 앞에 두고 도주하여 분리되어있던 법문 2호관을 권력의 손에 넘겼다. 법문 2호관은 야스다 강당과 법학부 연구실, 열품관을 연결하는 주요 거점이었는데 여기를 기동대가 손쉽게 손에 넣음으로써 거점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이 배신은 그들이 반혁명으로 전락해버리는 출발점이었다.

 같은 시각 2,000명의 지원 부대가 츄오대에서 도쿄대로 밀려들어 왔고, 오챠노미즈 역 인근에서 기동대와 충돌했다. 데모대는 유시마 교차로와 오챠노미즈 교차로를 거점으로 삼아 기동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반복했고, 밤이 되자 혼고 3가[각주:5] 부근까지 도달한다. 니혼대 전공투와 각 대학 전공투가 참가했고 비록 혼고 캠퍼스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칸다[각주:6] 해방구 투쟁은 다음날 19일 밤까지 격렬하게 지속된다.

 15시 반 야스다 강당 뒤쪽에서 1층을 통해 처음으로 기동대원이 진입한다. 그러나 2층으로부터의 화염병 공격 때문에 바리케이드 철거 작업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정면 현관 바리케이드 파괴도 난항을 겪는다. 헬리콥터의 최루액 분사도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강당 좌측에서의 공격도 짱돌과 화염병을 맞고 실패한다. 17시 10분 경시청은 야스다 강당 봉쇄 해제를 일단 중지한다. 17시 19분 시계탑 방송은 ‘어떠한 기동대의 폭력에도 우리는 굴하지 않는다. 열 시간의 격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일본 국민을 전쟁과 억압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짓이기려고 하는 국가권력을 허용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야스다 강당은 꼬박 하루를 버텼다. 기동대는 밤새 물대포를 쏘았다.

 다음날 19일 6시 반 기동대는 야스다 강당 바리케이드 봉쇄 해제 작업을 재개했다. 시계탑 방송은 말했다. ‘모든 학생 제군, 대학 투쟁의 한판 승부의 승리를 거머쥐자! 전국의 투쟁하는 학생들의 요새인 이 곳을 지켜내자!’

 8시에는 또다시 기동대가 강당 1층에 진입해 2층까지의 파리케이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핵파는 전국에서 동원한 부대를 투입해 법학부 연구실, 시계탑 6층, 그리고 야스다 강당 2층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동대는 강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중핵파를 맞닥뜨렸다.

 11시 반 야스다 강당 정면의 바리케이드 해제가 재개되었지만 니혼대 전공투 공작대가 만든 정면 바리케이드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12시 15분 기동대는 2층에 진출했다. 2층부터 3층으로 대 강당을 올라오는 계단 바리케이드를 둘러싸고 공방전이 계속됐다. 기동대가 대강당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대강당의 수비대 전원이 체포된 것은 15시 50분이었다. 17시 반 대강당 옥상에 있던 약 90명이 체포되었다. 17시 35분 마지막으로 시계탑 방송이 흘러나온다.

 ‘우리의 투쟁은 승리했습니다. 전국의 학생, 시민, 노동자 여러분, 우리의 투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신 투쟁하는 동지 제군이 또다시 해방 강당에서 시계탑 방송을 하는 그날까지 이 방송을 잠시 중지하겠습니다.’

 17시 45분 야스다 강당의 가장 위, 즉 시계탑 옥상에서 마지막까지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서슬 퍼런 기동대의 폭력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1969년 2월 “구원뉴스”는 도쿄대 캠퍼스 안에서의 부상 상황은 화상 109명(중상 35명), 타박상 87명(중상 17명), 열상 24명, 골절 8명, 안구 파열 4명(실명 1명)이라고 밝혔다. 1월 18일~19일 체포자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도쿄대 캠퍼스 안에서 682명(514명 기소), 칸다 및 기타 투쟁에서 136명(37명 기소)이라는 자료가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1월 9일(51명 체포, 14명 기소)과 10일(149명 체포, 41명 기소) 체포자도 포함하면 합계 1,018명(606명 기소)이 된다. 대학 투쟁에서 이 정도로 많은 수가 기소된 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였다. 기소된 학생이 소속된 대학 수는 82개, 대학별로는 도쿄대 83명, 히로시마대 29명, 와세다대 23명, 도시샤대 18명, 메이지대, 호세이대는 각각 16명이다.

 야스다 강당 사수전이 벌어지는 동안 교양학부에서는 제8본관에 대한 일공계 부대의 공격이 정점을 찍고 있었다. 1월 15일부터 일공계 부대의 제8본관 포위가 시작됐다. 그날 이후 1층은 점거되고 전기, 가스, 수도가 끊긴다. 일공은 피칭머신으로 제8본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깼다. 19일에는 2층까지 진출한다. 21일 낮, 제8본관에 농성하던 조교 대표와 이마무라 교양학부 자치회 위원장 등 고마바 공투 75명은 봉쇄를 해제하고 건물에서 나온다.

야스다 강당 공방전. 살수차가 시계탑 위 학생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있다.

9. 니혼대 도쿄대 투쟁의 전국적 확대

 

 1월 20일 정부는 ‘도쿄대 입시 중지’를 발표한다. 그날 밤 야마모토 의장에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음이 알려졌다.

 도쿄대 전공투는 탄압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2월 10일 교양학부 대의원대회에서 ‘파업 강화, 고마바 재봉쇄’ 결의가 통과된다. 12일 전공투 1,500명이 야스다 강당 안에서 大内 경제학부장 규탄 집회를 개최했다. 3월 3일~4일 고마바 교수회의 규탄 투쟁이 벌어지고 당국은 기동대를 투입해 41명을 체포했다. 학내 기동대 투입은 일상이 되었다. 1월 10일 ‘10개 항목 확인’에 의한 ‘원칙적으로…기동대는 투입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은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도쿄대 투쟁과 야스다 강당 사수전은 전국 학생에게 충격을 주었다. 교토대를 선두로 들불처럼 파업 봉쇄 투쟁이 전국 캠퍼스로 확대됐다. 1월 16일 교토대에서 기숙사 문제를 계기로 학생들은 구마노 기숙사, 요시다 기숙사 등을 봉쇄했다. 교토대 당국, 민청, 우익과의 대격돌 속에서 22일 일단 봉쇄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27일 의학부 4회생이 의국 해체를 내걸고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고, 31일부터 교양학부가 무기한 파업에 들어간다. 문학부, 의학부, 공학부 등이 차례차례 무기한 바리케이드 파업에 합류하며 교토대 전공투는 민청의 반혁명 게발트 부대의 적대를 물리치며 전진한다. 3월 1일~3일에는 교토대 입시 분쇄 대투쟁이 일어나고 도쿄대 전공투는 150명의 게발트 부대를 파견한다. 투쟁하는 세력은 교토대 본부와 교양학부 구내를 완전히 제압했다.

 도쿄대 투쟁은 계속되고 확대되며 전국 학생 총반란으로 이어진다. 교토대에 이어 오오사카대, 도쿄공대, 요코하마 국립대, 토야마대, 히로시마대 등이 차례차례 바리케이드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대학 약 380개교 중 68년에 39개교가 바리케이드 봉쇄, 점거투쟁에 돌입해 있었는데, 69년이 되자 140개교로 급증한다. 69년 4월 28일 호세이대가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정치 슬로건을 내걸고 전학 바리케이드 파업에 돌입했다. 8월 17일~18일 29명의 학생이 30시간이나 기동대와 싸운 히로시마 대학 해방 진지 사수전이 벌어진다. 9월 21일~22일에는 교토대 시계탑 사수 결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9월 5일 ‘전국 전공투 연합’이 결성되는데, 회장에서 야마모토 의장이 체포된다. 투쟁의 화염은 고등학교로도 확대됐다. 대학 투쟁은 70년 안보 오키나와 결전과 결합해 더욱 발전해갔다.

 

10. 도쿄대 투쟁을 계승하며

 

 ‘도쿄대 투쟁은 제국주의 국가의 지적 중추에 있는 정신의 쓰레기통과 같은 도쿄대학의 부패 속에서 공격적 지성을 복권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도쿄대학은 그러한 고발에 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도쿄대 당국은 “입시 실시”를 표어로 삼아 옛 질서를 회복하기에 분주했고, 끝내는 우리를 국가권력에 팔아넘겼다. …지금 도쿄대에 존재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해체”라는 이유뿐일 것이다.’(“지성”)

 ‘진정으로 투쟁한 자들은 도쿄대 투쟁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쿄대 투쟁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든 끝나지 않았다.’

 도쿄대 투쟁에 끝을 고하지 않고 다시 살려내는 길은 지금 21세기의 도쿄대학에서 신자유주의 대학 분쇄-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학생의 단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만이 도쿄대 투쟁을 주체적으로 총괄하는 길이다.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 Gewalt+봉. 각목 등 일본 신좌익이 사용한 무기를 의미한다. 게발트는 독일어로 폭력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고마바 캠퍼스 축제 [본문으로]
  3. 도쿄대 학생활동가. 안보투쟁 과정에서 기동대의 폭행에 의해 사망. [본문으로]
  4. 선전선동부 [본문으로]
  5. 도쿄대 정문 앞 거리 [본문으로]
  6. 도쿄대 인근 지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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