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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은 '노래'를 잊어라(1973) - 에다 사부로의 정론지 '제군!' 기고문 본문

일본 좌파 운동 번역/일본사회당

사회당은 '노래'를 잊어라(1973) - 에다 사부로의 정론지 '제군!' 기고문

0079char 2020. 12. 17.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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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주류였던 좌파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거쳐 했습니다. 이제는 좌파의 레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공산당의 구조개혁론을 차용하여 복지국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사회당 당내 우파의 주장도 실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구조개혁론을 주장하던 에다 사부로가 보수 정론지 '제군!'에 기고한 글입니다. 일본사회당 구조개혁론자들의 대강의 주장과 당내 좌파를 대하는 시선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일본사회당 당내 우파였던 구조개혁파의 수장 에다 사부로. 당내 주류였던 사회주의협회를 비롯한 좌파의 레닌주의적 입장에 맞서 사회당을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탈바꿈하려 노력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노래'를 잊어라(1973) - 에다 사부로

  보름가량 서유럽에 다녀왔다. 4월 10일부터 5일간 하노버에서 열린 사민당 대회를 견학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합 협정으로 보수 진영을 추격한 프랑스 총선, 노동당이 승리한 영국 지방선거 등 격렬하게 요동치는 서구의 정치 상황을 접해보았다. 그것이 정권 구상을 제시하길 강요받는 일본의 혁신 진영에게 무언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독 사민당 대회는 국내외의 큰 관심을 얻었고, 회장 입구는 방청권을 찾는 사람들로 열기가 가득했다. 그럴만한것이, 최근 급속히 성장한 청년부(JUSO)가 브란트 체제에 반역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아, 브란트도 대회 전 "선거에 있어서는 국민에게 공약 한 정책과 다른 결정이 대회에서 결정되는 경우, 당수를 사임할 수밖에 없다"며 강경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사민당은 1959년 계급적 대중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 반대주의가 아닌 개혁주의와 개입주의를 지향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했다. 이후 선거마다 득표율을 3% 이상 올렸고, 대연정, 나아가 소연정이라 불리는 보수당과의 연립 정권까지 이르렀다.

    십년 전 60만 명이었던 당원은 지금 100만을 넘어있다. 고참 당원들 가운데는 최근 10년간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100만 명 중 70만 명은 당 경력이 10년 이내이다. 1863년 창당한 긴 역사를 가진이 이 당은 당원의 연령 구성으로 보면 청년의 당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 가을 총선 이후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12만 명이 입당했는데, 그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 또는 재학 중인 인텔리이며, 당은 점점 젊어지고 있다.

  35세까지의 당원은 청년부에 소속된다. 청년부 위원장은 독자적인 대회에서 선출되지만, 취임은 본부 간부회의 확인을 필요로 하니, 본부 간부회의 감독 하에 있는 당내의 분열이라 할 수 있다. 당 전체가 하나의 방침으로 뭉쳐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좌파 노선이라고 하며, 이 청년부와 동조자인 당내 좌파를 더하면 전체 대의원의 4할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회장 내부는 흰색, 파랑, 오렌지색으로 채워졌고, 계속해서 자료를 배부하는 아가씨들은 새빨간 스웨터. 지극히 컬러풀하다. 장발에 넥타이가 없는 젊은 대의원들이 많다. 옆 자리의 당 경력 오십년인 서베를린 지구 예비 대의원에게 장발족의 편안한 모습에 대해 묻자, "젊은이들 공통의 반항 정신의 표현이다. 지금은 순사도 군인도 장발이 허용된다"라고 대답하곤, "그들은 우리가 어렵게 쟁취한 것을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마냥, 감사해하지도 않고 누리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지금 서독은 서른살 즈음의 시장과 대학 학장이 등장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의 시대이다. 브란트는 "사회당은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만인에게 열린 위대한 통합 능력을 가진 국민 정당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노동자는 전체 당원의 35%에 ​​불과하다. 젊은 에너지가 당에 결집하는 것은 발전이 약속된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당과 일반 국민 사이에 벽이 생길 우려도 있다.

  브란트도 이런 현상을 우려하여 대회 기조연설 속에서 노동조합원의 적극적 입당, 오랫동안 고생을 함께 한 나이 많은 당원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1. 노벨 평화상의 중요한 의미

  대회는 전원집회 외에도 1975년 ~ 85년 경제 정치 기본 계획, 토지 정책, 근로자 재산형성의 세 분과를 가지고 있었다. 전원집회에서 청년부 대표가 NATO 이탈, 미군 철수, 중립 외교로의 전환을 주장했지만, 브란트는 장황한 연설에 반박했다.

  대회장은 조용해졌고, 연설이 끝나자 큰 박수가 있었다. 총선 전에 동방 정책으로 인해 반대 당에게 몰리고, 근소한 차로 불신임을 면했을 때, 일반 회사 여직원까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외교에는 자신만만한 브란트였으며, 설득력도 있고, 청년부 대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브란트의 동유럽과의 긴장 완화 외교는 보수와의 대연정 하에서 외교부 장관으로써 첫걸음을 뗐고, 이후 사민당 중심의 자민당과의 소연정 시대에 크게 전진했다. 소련과의 무력 불행사 조약 체결에 성공하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그는 이 대회 종료 후 즉시 유고를 방문했고, 귀국할 시간도 없이 미국으로 가서 닉슨과 회담했다. 서독 신문에 따르면 그는 닉슨에게 "서독은 이제 사회적 자유주의의 시대이다"라고 단언한다.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서독에서는 이전부터 사회적 자유경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사회적, 계획적인 틀 속에서 시장을 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와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 사회주의라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발언이 아니라, 서구의 보수 세력을 상대해온 전통적인 미국의 외교 자세에 전환을 요구한 발언인 셈이다.

  이어서, 브레즈네프와의 회담이다. 이 양자 협정과 성명에 대해 서유럽 국가들은 유럽을 크게 바꾸는 역사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독소 양국이 공존에서 협력 관계로 들어서는 이 협정은, 이미 국교가 정상화된 서독과 유고 및 폴란드와의 관계, 동독과 서독의 상호 승인, 서독과 체코와의 외교관계 복구 등에 의해 지탱되기에, 불가역적인 것이 된다. 또한 협정과 동시에 발표된 공동 성명은 전 유럽 안보와 동서 병력 감축 협상에 양국의 적극적인 노력을 약속했다. 이 정신은 이후 미 · 소 정상 회담으로 이어진다. 전 유럽, 나아가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청년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NATO 이탈로써 평화행보를 강화하거나, NATO에 머물며 NATO를 형해화시킬 현실적인 조건을 쌓아 올려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브란트는 후자의 경로를 선택하고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취하고 있다. 영국 '타임스'는 EC의 맹주를 꼽으라면 브란트일 수밖에 없다고 논했다.

  청년부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명확하지만, 외교는 직선도 있고 곡선도 있다. 베를린 장벽으로 둘러싸이고 소련이 핵무기를 들이댈 수 있는 서독에서 브란트는 "(독일은) EC의 중급 국가이며, 장래에도 대국을 목표로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 노선으로 창조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브란트의 이 말은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사회주의의 노래는 뭔가

  외교면에서 브란트에게 상대가 되지 않은 청년부와 좌파는 국내정치 쪽을 물어뜯었다. 외교 논쟁에서 일축당한 청년부 대표가 "본래 외교는 2차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내정"이라며 나에게 한 말은 자기 합리화인지 본심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날카롭게 추궁했다.

  브란트의 내정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혁신 진영에서도 독일 사민당은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아'이며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다, 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사회주의의 노래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이론은 맑스 - 레닌주의가 주류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중대하게 노동계급과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맑스 - 레닌주의자의 선전이 침투되어 있고, 객관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자신이 사민주의자라고 명확하게 표명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니시오 스에히로씨가 이끄는 민사당이 사회민주주의의 본류라고 자칭한 탓에, 민사당의 싱거운 이미지와 엮어버려서 사회민주주의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받아오지 않았다. 사민주의는 개량주의이며 사회주의를 잊은 것이다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취급하는 쪽이 많다.

  브란트는 1969년 총선에서 사민당을 '개혁정당'이라고 선언하고, 일련의 '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개량은 체제 범위 안에서의 추구이지만, 개혁은 체제를 극복한다. 혁명이 극히 단기간에 체제를 변혁하려 하는 반면 개혁은 긴 시간 동안 새로운 형성을 행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형태와 양뿐만이 아니라, 끊임없는 사회의 민주화와 개혁의 과정 그 자체이다. 인간의 세계가 계속되는 한, 개혁의 궁극적 도달점은 없기 때문이다.

  맑스가 1849 저서 '신성 가족'에서 '공산주의는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또한 현실이 거기에 준해야 하는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 부르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이다'라고 한 것도 잘 생각해보면 같은 말이라 생각한다.

  고정된 좁은 이데올로기 위에서 혁명이다, 반독점이다, 외치며 저항하는 것에만 시종일관 몰두하고 있는것이야 말로 생생한 노래를 잊어버리고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가수로 전락해가는 것이 아닌가.

  사민당의 추구하는 개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1966년 사민당이 기민련과 소위 대연정으로 집권하자 외무상 브란트의 획기적인 외교 정책, 실러 경제장관의 불황 탈출 정책, 그 밖에도 레버 교통장관, 하이네만 법무장관 등에 의해 개혁 실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를 발판으로 한 '개혁 정책'을 내걸고 69년 선거에서 약진하자 기민련과 결별하고 소수당인 자유민주당과 소위 소연정을 이뤄, 기존 정책의 재작업 대신 사회, 경제, 문화 구조의 본격적인 개혁에 임했다. 그 내용은 교육 개혁, 피해자 공동 결정권의 확대와 재산 형성, 누진세와 사회 보장의 강화, 사회 자본 내실화와 환경 정비 등이다. 작년 가을 선거에 이르기까지 3년간은 여야의 의석 차이가 작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이 아직은 땅을 다지는 단계이긴 하지만, 이미 다른 서방 국가를 추월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3. 문제는 삶의 질

  아무튼, 청년부와 좌파가 첫째로 문제 삼은 것은 장기 경제 계획이다. 지금까지의 당의 정책은 현상에 대응하는 정책이며, 개혁의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장기 계획도 불철저하며, 여전히 경제 성장에 편향되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당수이며, 대표적인 당내 우파라 불리는 슈미트와 그 파는 '이론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추상론이 아니라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 간부 중에서도 에어하르트 에플러 경제협력상 등이 경제의 양에서 질로의 가치전환과 그에 기초한 정책 전환을 주장하는 등, 애초부터 이 계획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본부 측도 이 점을 인정하고, 본래 이 대회에서 채택하고 올해부터 실행하려던 것을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향후 1년간 검토하기로 아예 방침을 바꿔버렸다.

  에플러는 금속노조가 주최한 '삶의 질' 국제 심포지엄에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많은 자동차를 위해 더 넓은 도로가 만들어지고, 더 많은 에너지 소비를 위해 더 큰 발전소가 건설되고, 낮은 품질의 소비재를 위해 더 사치스러운 포장이 이뤄지고, 더 빠른 항공기를 위해 더 많은 공항이 건설되어, 그 결과, 보다 오염된 공기, 보다 견디기 힘든 소음, 보다 더러워진 물, 보다 자극된 인간, 보다 많은 독약의 인체 조직 침체, 그리고 거리에서 더 많은 사망자......."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근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토지 정책은 청년부가 2년 전부터 주장해온 '계획 구역 내에서 지자체가 선매권을 갖고, 사적 기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여기에 대해 부동산업자들이 헌법 위반이라며 반대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근로자의 자산 형성은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이익금 중에서 기금을 적립해 직원에게 자택을 보증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부는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 원안이 승인되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소속 대의원의 일부도 반대했다.

  이처럼 국내정치에 대해 청년부는 날카롭게 몰아붙였지만, 대회 종료 후 청년부 대표와 회담을 해보니 대회 결정에 매우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대회 전에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수정하길 바라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았다. "당원의 체질이 변하지 않으면 강령만 바꾸어도 의미가 없다. 게다가 현재의 강령은 해석의 폭이 넓으니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대답했다. 너희들은 맑시스트냐, 라고 묻자, "그렇게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단지, 현대에는 맑시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고, 맑시스트인지 아닌지 여부의 논의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이후의 내용은 당시 독일 사민당의 현실정당화가 청년당원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내용, 독일의 환경운동이 성장한다는 내용, 독일의 정당 국고보조금 제도에 대해 긍정하는 내용으로, 번역을 하기보다 후대의 관련 자료나 연구를 찾아보는 편이 나을 듯 하여 따로 번역하여 싣지 않았습니다.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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