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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① 일본사회당과 '구조개혁론' - 히시야마 이쿠오 본문

일본 좌파 운동 번역/일본사회당

[논문]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① 일본사회당과 '구조개혁론' - 히시야마 이쿠오

0079char 2020. 12. 2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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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사회주의, 이탈리아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을 다룬 1~6장을 생략하고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을 다룬 7장 만을 번역했습니다. -역자 주-

 

목차

1.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① 일본사회당과 '구조개혁론' 

2.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② - 일본 구조개혁론 형성과 현대 일본 자본주의 논쟁

 

사회당이 참패한 1969년 총선 당시 개표 결과를 심각하게 지켜보는 당시 지도부. 가장 우측의 팔짱을 낀 사람이 에다 사부로이다.

 

(1) 일본사회당과 '구조개혁론'

- 도입부터 패주까지 -

 

 

  '구조개혁론'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공산당에 의해서 구체적, 실천적인 방법으로서 형성되었다. 이를 일본에 소개하고 보급에 힘썼던 이들은 일본 공산당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로, '현대 마르크스주의파' 혹은 '경제분석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주요 논자는 사토 노보루, 오노 요시히코, 스기타 마사오, 이시도 기요토모, 오오하시 슈지 등이다. '구조개혁론'은 이런 식으로 우선 이론 전선에 도입되었고, 사회당의 내부에도 침투해 나가고, 에다 사부로 등의 지지를 받아, 후에 구조개혁파(에다파 그룹)를 형성하게 된다.

 

  일본에서 '구조개혁론'이 처음으로 실천적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60년 (쇼와 35년) 10월 11일에 열린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이다. 여기에서 발표된 '총선 승리와 당 전진을 위해'라는 제목의 투쟁 방침에서 '이케다 내각의 개혁정책과 대결하고, 그러한 자세로 독점 자본의 지배에 맞서 국민 제계층의 생활 향상을 중심 목표로 하도록 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장기 정치 경제계획을 갖는다'는 방침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혔다. 이것이 처음으로 사회당의 새로운 노선으로써 공식적으로 제기된 '구조개혁론'이다.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한 '구조개혁론'은 단순히 사회당과 혁신 세력 내부뿐만 아니라 언론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구조개혁론'이 처음 공표된 투쟁방침은 다음과 같은 투쟁 방향을 중점으로 삼는다. "보수당 정권은 대자본에 봉사하고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는 저임금과 기업 격차의 확대를 지렛대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도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있다. 단순히 경제 성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복지 생활 향상이 첫 목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는 '국민 제계층의 생활 향상'이며, 두 번째 목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독점 지배 구조 변혁, 즉 '독점의 정책을 제한하는 것'이다. 또, 임금 상승을 전제로 하는 수출 확보를 위한 '무역 구조의 변혁'이 세 번째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보 체제의 해소, 중립 정책 실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활 향상, 반독점, 중립이라는 세 요구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틀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 변혁이며, 보수당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국민에 의한 독점적 경제 구조 규제이다. 일본에서는 국민이 생활과 정치를 자신의 손으로 바꾸어가는 민주주의 전통이 약하므로 서양에서는 상식이 되어있는 독점 규제가 방임되어 있고, 높은 독점 가격 및 투자를 우대하는 조세 구조가 유지되고 있으며, 사회 보장과 주택 투자가 현저히 낮다. 우리는 이에 반대하고 반독점 구조개혁 국민 연합을 통해 독점 자본에 시달리고있는 농어민, 중소기업도 운동에 통합하며 이 투쟁을 추진해 나가야한다." 이렇게 중앙집행위원회 결의로 '구조개혁론'을 사회당의 신노선으로 채용한 실천적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사회당은 이틀 후인 13일 임시 당대회를 열어 이 이론을 당대회라는 공적 무대에서 결정하고 새로운 노선으로 명확히 못박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1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사회당, 민사당 3당 당수 입회 연설회에서 당시 사회당 위원장이던 아사누마가 우익 소년에게 칼에 찔려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대회는 순식간에 아사누마 위원장 추모 대회, 우익 폭력에 대한 분노의 항의 집회 양상으로 돌변했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을 내세우는, '구조개혁론'을 채용한 새로운 노선도 이 대회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은 채 가결되었다.

 

  사회당에서의 '구조개혁론' 연구는 이미 1958년 중반부터 당시 서기장이었던 에다와 나리타 정책심의회장 등을 중심으로 당 중견 서기 그룹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진지한 토의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내부에는 '구조개혁론'의 채택 방법에 대해 세가지의 다른 기류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의 사회당 내에서 주도권을 잡고있던 스즈키 파와 결합한 서기국 그룹[각주:1]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당내 좌파의 (정치적 이론적) 근거가 되어왔던 구(舊) 좌사회당 강령을 실천적으로 풍부하게 하고싶어했고, 그런 의도에서 '구조개혁론'은 이탈리아 공산당에 의해 정식으로 채용된 정책이므로 구조개혁론은 '좌익적 이론임에 틀림없다'며 신뢰하고 있었다. 둘째는 나중에 에다파의 서기국 그룹을 형성하는 조류인데,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구 좌사회당 강령의 사상 중 '전쟁과 공황을 혁명의 기본 조건처럼 여기는 사고'와 결별하고, '구조개혁 이론'에 의해 새롭게 당을 혁신하고 당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세 번째 흐름은 '구조개혁론'으로 기운 당 의원들이었다. 당시 사회당에 대한 언론의 '사회주의권 일변도', '무엇이든 반대하는 사회당'등의 비판은 민사당이 성립[각주:2]된 이후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의원들은 '구조개혁론'은 당 정책에 어떤 '현실성'을 부여하고, 언론의 비판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의회 활동에 합리적인 근거와 방향성을 주는 것, 이라고 소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960 년 10 월 임시 당대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승인된 '구조개혁' 노선은 이후 에다 서기장, 나리타 정책심의회장 등 에다-나리타 라인(江田―成田ライン)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당 내에서 '구조개혁론'이 조직적이고 종합적으로 당 전체의 관점에서 검토된 것은 아니고, 에다를 중심으로 한 '구조개혁파'라고 불리는 하나의 정책 파벌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거기에 사회당은 사상적, 체질적으로 다양하고 상이한 흐름들을 가진 파벌 연합정당이었으므로, '구조개혁' 이론과 노선이 사회당 전체에서 올바르게 확산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조개혁론'의 방향과 내용은 곧 기묘하게 흘러갔고, 본래의 궤도로부터도, 아래로부터의 올바른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개혁론'은, 당시 사회당의 현대적 노선을 엄격하게 추구하고 있던 혁명 이론과 관계를 갖기보다, 오히려 당내 무드에 가까운 '사회당의 자세론(論)'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예를 들어, '시종일관 계급투쟁만 얘기하지 않는 사회당', '미국과도 사이좋게 지낼 사회당', '이케다 내각 하에서도 실행가능한 정책을 만드는 사회당', '현실적이고 국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회당' 등등, 총선을 앞두고 이러한 부드러운 이미지와 분위기 만들기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저것이 구체화된 '구조개혁론' 같은 인상이 주어졌다. 이러한 부드러운 '안방 분위기'는 에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당 내에서 '구조개혁 노선'의 본질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고, 특히 당내 좌파를 강하게 자극한다는 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당내의 '구조개혁파'라 불리는 그룹[각주:3]은 당 기관지국을 발판으로 하여 <사회신보>나 <월간 사회당>을 통해 대대적인 '구조개혁 노선'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에다-나리타 라인이 '구조개혁 노선'을 제기하기에 이른 이유 중 하나는 안보 투쟁과 미쓰이 미이케 투쟁의 '패배'에 대한 반성에서였다. 즉, 안보 투쟁에선 사회당을 중심으로 '안보 반대・반 기시내각 운동'을 고양시켜 결국 기시내각을 퇴진으로 몰아넣었지만, '신안보 조약'은 체결되었고, 전후 사상 유례가 없던 대투쟁도 실질적으로는 '패배'라는 형태로 끝났다. 그 결과, 기시내각의 후임으로 '소득 증가', '고도 경제 성장'을 주창하는 같은 자민당 소속 이케다 저(低) 자세 내각이 탄생했고, 기대와 달리 사회당 정권을 실현시킬 기운은 고조되지 않았다. 이는 사회당이 심각한 반성을 하게 만들었고, 사회당이 노조에만 세력이 있고 널리 국민 각계각층에 침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자기비판이 제기됐다. 그리고 사회당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실현을 위해서는 '일반 민주주의 투쟁 - 평화를 지키는 투쟁과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는 투쟁,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투쟁 등을 통해서 널리 국민 각 계층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이러한 투쟁을 노동자 계급이 주도해감으로써 보수 진영의 요새를 하나하나 부셔나가야 한다. 또 미쓰이 미이케에서 같은 탄광의 인원 정리에 대한 투쟁은 노조의 저항투쟁뿐 아니라 정부와 독점 자본의 석탄 정책 자체를 개혁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구조개혁론'을 채용한 새로운 방침이 꼭 필요하다는 견해에 도달했고, 이미 보았듯 새로운 노선으로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구조개혁론'이 제기된 이유는 '안보투쟁과 미쓰이 미이케 투쟁의 패배'라는 심각한 사태뿐 아니라, 사회당의 당내 사정에서 더 크게 기인한다.

 

  <사회신보> 1961년 1월 1일 호에서 발표된 '구조개혁투쟁'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는 '구조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른 이유 및 내용에 대해 "지금까지의 사회당 정책은 집권 이후 어떻게 할지에 중점이 놓여 있으며,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쟁과 공황을 객관적 조건으로 삼아 혁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이른바 '궁핍 혁명론'이나, 혹은 개량을 쌓아나감으로써 혁명이 달성된다는 '조금씩 혁명론'이 태어날 여지가 있었지만, '구조개혁 노선'은 정권 획득에 이르는 과정을 명확하게 한다'라고 설명한다.

 

  '구조개혁 노선'은 한마디로 말하면, 독점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정부 및 그에 이어진 권력이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한 경제 구조를 유지, 강화하려고 하는 것에 대항해, 독점자본에게 피해받는 세력을 통합하여 정책 전환을 모색한다, 라고 정리할 수 있다. 즉, 독점자본이 제출한 정책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근거로 하여 적극적으로 권력 지배를 제한하고 정책 전환 요구 투쟁을 벌여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된 '구조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노동자계급 및 민주 세력 힘의 증대', '사회당의 주체성' 등의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구조개혁 노선'의 투쟁을 가능하게 하고 보증하는 조건은 일본의 민주헌법과 헌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민주적 제도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민주적 제도 및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욱 확충하고 근로 국민 대중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2) 전후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특징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다. 여기에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생산력의 사회화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으로 국가의 경제 간섭 · 개입이 필연적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 근로 국민 대중의 힘과 발언권이 확대됐다. 이로부터 독점자본을 위한 국가의 경제 간섭 및 개입을 근로 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변경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하부구조인 생산관계 속에서 노동자의 요구와 발언권을 통해 이를 부분적으로 변혁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3) 사회당은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뛰어넘었고, 조직활동면에서 아직 많은 단점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점차 일본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당으로서의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全) 당적으로 안보 투쟁이라는 중대한 투쟁에 임한 당은, 필연적으로 당의 행동력을 높이고 이론을 심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당이 얻은 이 소중한 경험은 앞으로의 구조개혁이라는 고도의 투쟁에 종사할 때 충분히 꽃 피울 것이고, 이를 통해 투쟁의 정치적 지도부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구조개혁론'은 이것이 '일본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이론적 근거를 얻고 있는데, '구조개혁론'이 제기되는 이유, 내용,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지적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거기에서 다음으로 이러한 '구조개혁 노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나온다. 그것에 대해서는 같은 논문의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서 '구조개혁 투쟁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우선 사회당의 혁신, 즉 당조직의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그것은 당의 기구 개혁 실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해온 노조 기관에 대한 의존에서의 탈피, 의원 편중 경향의 시정을 더욱 철저히 하는 것이다. 또, '구조개혁' 투쟁에서 사회당이 정치적 지도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전당이 신속하게 새로운 정치 노선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이론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운동의 실천 속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고 말한다.

 

  '이 '구조개혁'의 투쟁을 구체화하고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근로 대중의 강력한 동맹에 의한 통일 조직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자, 농민, 어민, 중소기업 경영자 및 독점 지배에 반대하고 현실적인 요구와 이익을 획득하길 원하는 모든 시민의 투쟁하는 대중 조직을 각각의 분야에서 조직하고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지금까지의 독점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한 투쟁으로부터는 원인인 정책 자체의 변경을 요구하는 투쟁으로의 질적 변화, 기업의식을 극복하고 기업 경영주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는 계급 전체의 정책 과제를 내걸고 독점자본과 권력의 정책 변경 및 제한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또한 독점 지배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 어민, 영세 중소기업을 포함한 독점과 권력의 정책을 변경시키는 투쟁과 동시에, 주민의 요구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지자체 투쟁을 '구조개혁'의 노선 위에서 확실하게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체화하고 대중투쟁의 가장 중요한 기초로 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구조개혁론'의 윤곽이 점차 밝혀짐에 따라 이에 대한 비판과 반박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1960년 12월의 오오타 카오루 前 총평 의장의 견해 발표이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오오타는 먼저 '앞으로의 정책 전환 투쟁은 미쓰이 미이케 투쟁처럼 철저한 저항 위에서 조직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총평 입장에서 말하자면, 사회당의 '구조개혁' 정책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총평의 정책 전환 요구가 노동자의 철저한 저항투쟁을 기초로 해야 하듯, '구조개혁' 방침을 조직론에서 떼어놓고 논한다면 의미가 없다. 특히 지금의 사회당 조직이 역 피라미드 상태인 것은 '구조개혁'에 있어서 매우 큰, 기본적인 결함이다. 또, 사회당에 명확한 혁명 강령이 없는데, '구조개혁론'이 나오면 '개량주의'에 빠질 위험이 매우 크다.' 또한 오오타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이어 이듬해 1961년 1월 <월간 사회당>에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에 대한 일곱 의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이전에 제출했던 문제점에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덧붙였다. '(1) '구조개혁론'은 국가독점자본주의 [각주:4]의 현 단계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2) 통일 전선 정부에서 사회주의 정권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3) 통일전선론을 이야기했는데, 사회당은 공산당과 선을 긋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따라 적극적인 비판론을 전개한 것이 사회당 좌파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키사카 이츠로였다. 사키사카는 '사회주의' 1961년 2월호에 '구조개혁론과 사회당의 과제'를 발표하고 오오타 씨와 거의 같은 입장에서 반론을 폈다. 해당 글에서 사키사카는 먼저 '구조개혁주의자가 내세우는 정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장해 온 것을 포함한다.'며 구조개혁론의 혁신성을 부정하고, '만약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경시하고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힘을 쌓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정책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개량주의'로 빠지는 것이다. 사회당은 원래 '개량주의'에 빠지기 쉬운 체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엄격하게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혁명 정신'의 고양을 강조했다. 이렇게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에 대한 비판론이 공공연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를 둘러싼 논쟁도 갑자기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렇게 활발하게 전개된 논쟁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당 전체의 검토가 부족한 데다 파벌 연합 정당의 특수한 체질이 차례차례 노출되었기 때문에 논쟁은 불통일적으로 파벌 차원의 논쟁으로 환원되고 왜곡되며 발전해 갔다. 따라서 과거 '구조개혁론'을 막 제기했을 때의 날카로운 문제의식도 점차 퇴색되어 갔다.

 

  1961년 3월, 전례 없는 논쟁의 전개를 이어받은 제20회 사회당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구조개혁론'이 드디어 공식적인 형태로 당 전체의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대회는 먼저 에다의 지도 방식과 내용 논의에 집중되고, '무드 구조개혁론'에 엄격한 비판이 이뤄졌고, 구체적인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평가로 옮겨 갔다. 특히 마쓰모토 지이치로, 오카다 하루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당내 가장 왼쪽 세력인 평화동지회는 에다 서기장 등 당 집행부에 대해 '구조개혁 노선은 반독점만을 내세울 뿐 '반(反)미제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다.'며 '구조개혁 노선'에 대한 강한 불만과 비판을 드러냈다. 이렇게 '구조개혁 노선'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한 이 대회는 '사회당의 주체적인 힘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는 대의명분론이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탓에 파벌간 항쟁에 의한 '구조개혁론' 가부를 둘러싼 정면충돌은 아니었고, 일단 '구조개혁 노선'은 전체의 승인을 받게 된다.

 

  이렇게 격렬한 논의 끝에 '구조개혁 노선'은 마침내 당 전체의 승인을 거쳐 새롭게 선출된 카와카미 위원장을 앞세운 에다-나리타 체제하에서 재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당내에서 스즈키-사사키파, 평화동지회 등 '구조개혁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세력이 나타나고, 결국 이것이 파벌 문제와도 맞물려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이후 한층 격화하여 사회당 내부를 격렬하게 흔들게 된다.

 

  논쟁의 두 번째 단계에서 다시 '구조개혁론' 비판을 정면으로 제기한 것은 사회당에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앞서 말한 오오타, 사키사카였다. 1962년 (쇼와 37년) 1월, 두 사람은 연명에 의해 '구조개혁론' 비판을 발표하여 사회당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 '에다 서기장이 주장하는 '구조개혁론'은 '개량주의'다.'라고 단정했고, 다음 당대회에서 진행된 서기장 선거에서 '구조개혁 노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사키 고조를 지지할 것임을 분명하게 했다. 이처럼 정면으로 '구조개혁론'에 반대한 오오타, 사키사카 두 사람의 견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구조개혁론은 독점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치 노동자의 헤게모니 하에서 민주적, 진보적 국유화가 있을 수 있다는 양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오류이며 본질적으로 '개량주의' 그 자체이다. 사회당에 결여된 것은 정책의 고안과 말만 앞서는 토론이 아니라 행동이다. 따라서 사회당에는 운동의 상도(常道)에 따라 일상투쟁을 강화하고 당세를 확대하는 이외에 길은 없다. 또한 당 운영의 현대화는 일관된 방침 하에 편견을 걷어내고, 알맞은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헌신적인 당 활동가의 의향을 존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구조개혁주의자 같은 좌우로 흔들리는 줏대 없는 언동은 헛되게 당내 혼란을 조장할 뿐 당의 현대화와 무관하다.

이러한 오오타, 사키사카 두 사람에 의한 전례 없는 엄격한 비판적 견해에 대해 에다 등 당 집행부는 '오오타, 사키사카 두 사람은 '구조개혁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고, '구조개혁'이야말로 사회당의 평화혁명을 구체적으로 명확히 한 것이며, 두 사람의 견해에는 평화혁명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즉각 반박했다. 여기에 이르러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논쟁은 초기의 모호한 모색 단계에서 시비를 가리는 논쟁의 단계로 발전했고, 당내에선 좌파를 중심으로 '반(反) 구조개혁'이 당당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0일부터 열린 제21차 당대회에서는 이러한 파벌에 얽혀 당내 갈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구조개혁 노선'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서기장 선거 상대 후보로 사사키가 스스로 입후보함으로써 '구조개혁'대 '반 구조개혁'의 파벌 싸움과 인사 분쟁이 갑자기 큰 초점이 되었다. '구조개혁론'은 초기의 순수한 당의 정책상의 문제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파벌 차원의 인사 분쟁과 당내 주도권 투쟁의 도구가 되었다.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사회당의 논쟁은 이렇게 점점 처음 제기되었을 때의 신선한 혁신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에서 크게 이탈해나갔고, 오로지 당의 전략・전술 노선으로써 '옳냐 그르냐'라는 식의 일면적인 논의에 빠져갔다. 또한 이 논의는 의원 파벌이라는 낮은 차원에서의 주도권 다툼에 휘말리기까지 하여 완전히 본래의 방향에서 벗어나 버렸다.

 

  대회는 다수를 유지하려는 주류파(구조개혁파)와 이에 반대하는 반(反) 주류파(반 구조개혁파)가 정면으로 대결했다. 또한 무대 뒤에서 이뤄진 파벌 간 작전과 흥정은 극히 치열했던 한편 그에 반비례하여 '구조개혁 노선'을 둘러싼 논의 내용은 점점 엷어져 땅에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전에 열린 제20차 당대회에서는 여전히 '구조개혁 노선'을 당면 투쟁에 자리매김으로써 '구조개혁 논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초기의 '구조개혁론' 자체가 단순한 파벌 싸움, 인사 투쟁의 구실이 되고, 구조개혁론에 대한 찬반은 그대로 파벌 세력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이목이 쏠린 차기 서기장을 비롯한 인선은 에다 323표, 사사키 260표로 결국 에다가 승리했고, '구조개혁 노선'은 다시금 유지되게끔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당의 전략 노선으로 정착시키려 했던 에다-나리타 파의 의견은 '반 구조개혁'의 강한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고, '구조개혁 노선'을 '전략'이 아닌 '전술'로 해야 한다는 수정안이 가결되었다. 수정안은 '구조개혁'이 '평화혁명을 일본에서 달성하기 위한 투쟁의 전술을 다양하게 전개하는 것이고, 전략 노선으로서 즉시 당의 기본 방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대회는 이렇게 '구조개혁 논쟁'을 파벌과 인사라는 낮은 차원의 논쟁으로 끌어내리고, '구조개혁'은 '전략'이 아니라 '전술'이라 규정함으로써, 점점 논쟁의 성격과 내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구조개혁'은 원래 장기적인 전망하에서 광범위한 대중 조직을 동원하여 수행하는 일관된 투쟁 방침이며, 이탈리아의 '구조개혁 노선'도 어디까지나 장기 기본전략으로 나온 것이고, '전술'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사회당이 이것을 '전술'이라고 규정한 것은 '구조개혁 노선' 자체를 애초부터 부정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7월 27일 닛코에서 열린 사회당 전국 지방 오르그[각주:5] 회의에서 에다 서기장은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류의 가능성을 최대한 개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제하고 '인류가 지금까지 달성한 큰 성과는 (1) 미국의 높은 평균 생활수준 (2) 소련의 철저한 사회 보장 (3)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 (4) 일본의 평화헌법 등 네 가지이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조정하고 나아갈 때 대중과 결합된 사회주의가 태어난다.'고 말했다.[각주:6] 이후 에다 서기장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코노미스트> 9월 29일호에 '사회주의의 새로운 비전'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닛코 발언의 취지를 더 자세하게 전개하고 사회주의의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이유를 네 가지 점에 비추어 설명했고, 네 가지 예시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근로자 계급의 역사적인 투쟁의 성과'임을 강조하고 '집단지성을 모아 국민의 마음을 떨쳐 일어서게 할 사회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코노미스트>에 에다의 견해가 발표됨과 동시에 당내에선 '반 구조개혁파'를 중심으로 '에다 비전'은 '우경화하려는 분위기다'라는 의견이 나타났다. 특히 '반 구조개혁'의 리더인 사사키는 '에다 서기장의 사회주의의 비전은 우리 당이 강령에 따라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제도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사회주의는 확고한 원칙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미・영・소・일 등 상이한 사회제도나 정책의 편의적인 짜깁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를 묻는 질의서를 집행부에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11월 말 제22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에다 비전 논쟁'이 전개되게 되었다.

 

  '에다 비전'을 둘러싼 논쟁은 이렇게 제22차 당대회를 앞두고 졸지에 활발해져, 파벌 싸움과 맞물려 사회당 전체를 논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했다. '에다 비전'에 대한 비판은 당내 '반 구조개혁파'뿐만 아니라 오오타, 사키사카 등 평소부터 '구조개혁 노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고, 비판 논문은 <사회신보>, <이코노미스트>, <사회주의> 등에 속속 발표되었다. 이들의 주된 비판점은 '(1) 서기장이 당 기관과 논의 없이 당과 관련 없는 잡지(이코노미스트) 등에 개인적 견해를 발표하는 것은 기관을 무시하는 것이다. (2) 사회주의는 인류의 미래를 여는 것이라는 견해는 공상적 사회주의로 역행하는 것이고 당 강령에서 벗어나있다. (3) 미국의 생활 수준, 영국의 의회주의, 일본의 평화헌법등의 부르주아적 본질을 무시하고 자본주의를 미화하고있다. (4)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길을 무시하고 현실의 힘든 투쟁에서 도망치고 있다.' 등이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에다는 <사회신보> 10월 28일호에서 '일본의 사회주의'란 제목으로 '사회주의의 문제는 (1) 사회주의 체제론 (2) 전략 전술론 (3) 일본 사회주의의 특수성 (4) 인류사의 성과 계승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논의되는 것이 옳고, <이코노미스트> 논문은 (1)과 (2)를 전제한 다음 (3)과 (4)에 중점을 둔 것이므로 강령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사회주의는 높은 생산성과 생활수준, 철저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비무장 중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인류의 성과로 내세운 네 가지는 그 예시에 불과하다. 국민에게 납득되는 비전을 내거는 것과 일상투쟁의 선두에 서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양자를 통일시켜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어쨌든 '에다 비전'은 당내에서는 결코 높게 평가받지 못했고, '무드 구조개혁론'이라며 비판받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반 구조개혁파'는 이에 편승하여 '에다 비전'을 공격하고 같은 식으로 '구조개혁론'을 공격했다. 대회를 앞두고 '에다 비전' 문제가 터진 것은 '구조개혁파'에 있어서 마이너스였다.

 

  '에다 비전', 그리고 이를 '우경화 분위기'라고 하는'반 에다파' 및 '반 구조개혁파'의 논쟁은 그대로 11월 27일부터 열린 제22차 당대회로 가져와졌다. 그리고 대회 첫째 날, 에다 서기장이 제창한 '사회주의의 비전'에 대해 스즈키-사사키 파를 비롯해 반 주류파로부터 날카로운 반발이 있었으며, 주류 3파(에다-나리타, 카와카미, 와다 파)의 치열한 논란의 응수가 이루어졌다. 스즈키-사사키 파를 중심으로 하는 반 당권파는 "서기장 스스로 당 기관의 의지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이론에 혼란을 줄 가능성이 있는 비전론을 당외에서 발표하고 나아가 지도체제 불일치를 초래하여 당의 혼란, 투쟁 체제에 대한 불안과 동요를 가져왔다."라는 서기장 비난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 결과, 이 "서기장 비난-에다 비전 비판"결의안은 22표 차이로 가결되었고, 여기서 실질적인 에다 서기장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성립한 것이 되어, 에다 서기장은 즉시 사임을 표명하고 "서기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에다 비전'의 패배는 주류, 특히'구조개혁파'에 큰 동요와 충격을 가져왔다. 게다가 에다가 차기 서기장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구조개혁 노선'을 추진해온 에다-나리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다 서기장의 사임이라는 비상사태를 불러일으킨 '비전 논쟁'은 이런 식으로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이목을 끈 에다 없는 차기 서기장 선거에는 나리타가 선출되었고, 차기 조직국장에 서기장을 사임한 에다가 선정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주류파가 주도권을 유지했다. 이렇게 주류는 대회 초입의 '비전 논쟁'에서는 패했지만, 인사면에서 우위를 지켰고, 에다-나리타 체제는 사실상 붕괴했지만 정책심의회장에 가츠마타 세이이치(구조개혁 노선 추진자 중 하나)가 선정돼 나리타-가츠마타 라인이 형성되어 '구조개혁 노선'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나리타-가츠마타 라인의 새로운 체제 하에서 의연히 '구조개혁 노선'을 추진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이 대회에서 '에다 비전'을 놓고 '구조개혁 노선'추진의 기둥이었던 에다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사실상 '구조개혁 노선'의 퇴조가 촉진되게 되었다. 동시에, '에다 비전'이 ​​패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에다의 '무드 구조개혁론'이 과했던 것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에다가 가진 분위기 자체를 '구조개혁론'의 본질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구조개혁론'이 본래 가진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의의를 평가하기 이전에 인사적이고 종파적인 차원에서 이론을 논쟁으로 바꿔치기하려고 하는 사회당의 근본 체질의 약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에다 비전'이 패배했음에도 같은 '구조개혁파'의 나리타가 서기장으로 선출됐다는 이른바 인사와 정책의 큰 '간극'은 사회당이 여전히 의원 파벌의 역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앞선 제21차 당대회에서 '구조개혁 노선'이 '전략'이 아닌 '전술'이라 규정했고, 이번 대회에서 '에다 비전'이 패배하고 에다-나리타 체제가 무너진 것은 '구조개혁 노선'이 초기의 실천적 의의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보・미쓰이 미이케 투쟁 직후의 심각한 반성기에 당내의 예리한 문제의식과 당의 사상체질 및 조직 체질 개선을 위한 강한 혁신 요구에 의해 실천 프로그램으로 등장한 '구조개혁 노선'은 결국 사회당의 약한 체질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구조개혁 노선'의 목표 중 하나인 당의 혁신, 당 조직의 개선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당내 대립을 격화시키고 종파적 보수주의를 만연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직 개선에 대한 방향으로 제기된 '구조개혁 노선'은 결국 조직 자체의 허약성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하게 되었다. '조직'을 시작으로 '조직'에게 패한 것이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이였다.

 

  현재 사회당의 강령에는 '구조개혁'이라는 말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현 사사키 체제는 분명히 '구조개혁 노선'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이 완전히 실추된 것은 아니다. '구조개혁파'를 통해 뿌리 깊은 힘을 가지고 있다. '구조개혁'을 둘러싼 당내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것이 여전히 종파적인 차원에서의 논쟁이라는 점이다. 종파적인 분파주의는 이론의 발전을 촉진하긴 커녕 점차 그것을 편집증적으로 만들 뿐이다. 또한 그것은 당의 조직 체질 개선에 역행하고 종파적인 보수주의를 잔존시켜 결국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다. 사회당이 하루빨리 여기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의 건설적인 발전은 도저히 바랄 수 없다. 건전하고 견고한 조직이 없는 곳에는 '구조개혁'이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1. (쿠레나이 회(會), 후에 '사회주의 연구소'로 개칭) [본문으로]
  2. 1960년 1월 24일 당 창건. 구성은 중의원 41명, 참의원 18명, 총 59명 [본문으로]
  3. 처음에는 파벌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이론 내지 정책 그룹이란 이미지를 강하게 밀어갔지만, 그 후 '구조개혁 논쟁' 과정에서 사회당적 체질에 따라 반대의 형태, 즉 파벌적으로 변화하고 있었기에, '에다-나리타 파'라는 새로운 파벌을 형성한다. [본문으로]
  4.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국가가 경제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독점 자본에게 특혜를 주고 독점체의 추가 착취와 지배를 돕는 것'이라고 설명되어있다. [본문으로]
  5. 지역 조직활동가 -역주- [본문으로]
  6. 이것이 훗날 이른바 '에다 비전'의 골자가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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