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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협회 테제의 학습을 위하여(1971) - 1장 노농파와 강좌파 본문

일본 좌파 운동 번역/일본사회당

사회주의 협회 테제의 학습을 위하여(1971) - 1장 노농파와 강좌파

0079char 2021. 1. 1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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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의 노농파 정파 '사회주의 협회'에서 발간한 '사회주의 협회 테제'에 수록된 간담회 글입니다.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두 개의 큰 흐름인 강좌파(공산당)와 노농파(사회당)를 (노농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다.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기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자 주

테제 '서문 사회주의 협회의 행보'에 대한 토론 (1)

I. 노농파와 강좌파


전쟁 전 고난의 길을 걸어온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을 쌓아 올린 선인들의 뛰어난 유산을 상속하지 않는다면 좌사강령도, 오늘의 「사회주의협회 테제」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테제」의 서문에 관련하여 전전의 노농파와 강좌파의 제 논쟁을 총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오늘 어떤 교훈을 전전(戰前) 운동으로부터 도출해야 할지, 또한 일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올바른 적용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것은 누구인지, 그것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A: 전전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봄에 있어서 우리의 선배들의 사상적, 이론적 전통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소위 노농파의 문제에 관해 여쭙고 싶은데요, 그 전에 '방향전환론'에 대해 약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쉽게 말해 대중, 특히 노동자 계급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이 없다는 내용의 '방향전환론'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속에 정당(政黨) 문제가 별로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야마카와 씨는 당시 정당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당시의 정세와 관련하여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키사카: 야마카와 씨의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전위」 제2권 제1호, 1922년 8월)이 작성되기 전에는 사회주의 동맹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여기 안에는 여러 요소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아나키스트도, 사회개량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포함해서 말이죠. 아직 이 시대까지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략이라던가 전술, 프롤레타리아 당이 왜 필요한지, 이런 것들이 명확하지 못해.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결집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방향전환」은 제1차 공산당과 관련하여 제출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야마카와 씨가 당의 문제를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죠. 저는 당시 외국에 있었기도 해서, 그 점은 분명히는 말할 수 없습니다. 노농파 내부에서 정당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낸 것은, 시기는 조금 늦긴 하지만 오히려 이노마타 씨[각주:1]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노마타 씨에 대해서는 한번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무산정당론에 관련한 횡단좌익론에서 야마카와 씨와 이노마타 씨는 명확히 입장이 갈리게 되는데, 이노마타 씨는 전위당을 무척 명확하게 생각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내용은 조금 조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본에 아직 그러한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을 때 그것을 성급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횡단좌익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잡지 「노농」에서 다 같이 야마카와 씨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야마카와 씨가 그것에 대답하는 형식의 문답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보면 야마카와 씨는 대중정당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활동함으로써 대중을 성장시키면서 전위정당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A: 의식이 높은 사회주의자들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대중과 결합하여 그 성장을 바탕으로 안에서부터 강력한 혁명 정당을 만들어간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까요.

사키사카: 그렇습니다.

B: 다이쇼 말년 '결합 전의 분리'라는 내용의 후쿠모토주의가 번성하게 되는데, 후쿠모토주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키사카: 후쿠모토 씨는 유학 중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이를 일본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본에 있는 기존의 정치 의식은 조합주의적 정치의식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주의적・혁명적 정치 의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는 내용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중심 문제를 단순히 러시아를 모방하여 일본에서도 하려는 생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 자체는 추상적으로 말하면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일본의 조건 하에서 언제, 어떤 형태로 전위당을 만들 것인지는 일본의 경제, 사회, 정치 상태를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는 그대로의 것을 당시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인데, 그 당시 일본도 거의 제국주의 단계에 있었고, 1차 대전 이후의 급격한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일본 자본주의가 급격히 몰락하는 것처럼 인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급격한 몰락 과정에 대응하여 시급히 전위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개량주의적인 혹은 레닌을 이해하지 않는, 즉 전위정당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일본의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사상과 명확하게 결별하고,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확립해야 함과 동시에 정당으로써도 확립해야 한다, 라는 이론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A: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기계적인 후쿠모토주의가 왜 그 당시 일세를 풍미한 것인가요.

사키사카: 하나의 원인은 후쿠모토주의에서 보여지는 변증법적 방법 -그것이 올바른지는 물론 다른 문제이지만- 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자는 유물사관을 경제사관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사회주의자는 제2인터내셔널을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사카이 씨와 야마카와 씨도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카우츠키든 메링이든, 철학,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 부족했다. 그러던 와중에 굉장히 철학적인 말을 사용한 후쿠모토 씨의 문장이 나온 것이니까, 그것이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매력을 주었지. 당시엔 아직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 계급의 결합이 무척 약했고, 굳이 꼽자면 인텔리겐차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후쿠모토주의가 여기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코루쉬나 루카치를 읽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후쿠모토 씨가 매우 철학적인 문장으로 야마카와 등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습니다. 후쿠모토주의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학생, 지식인 등은 후쿠모토의 문장을 통째로 암기하고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B: 후쿠모토 씨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어떤가요.

사키사카: 글자 그대로 읽는건 그렇다 쳐도 내용적인 이해는 못했었겠지. 운동을 해본 적이 없고, 국제적인 운동이나 일본 운동의 역사도 모르던 인간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무척 낮았던 것은 아닐까. 특히 후쿠모토주의자로서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A: 조금 전 이야기하신 후쿠모토의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사키사카: 그것은 역시, 당시 모순이 격화하고 있었던 것에서 나온 것이지요. 독점 자본의 지배와 함께 노동운동도 일어나고 있고, 그런 배경들로 일본 자본주의가 급격히 몰락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사회의 여러 조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무척 불충분합니다.

A: 급진적 운동의 경우 언제나 혁명적 정세를 꿈꾼다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후쿠모토주의의 경우에도 그런 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키사카: 그렇습니다. 후쿠모토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이것은 예전의 일본공산당의 특징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상시적으로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있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다는 점입니다. 저런 식으로 닥치는대로 비합법 운동으로 잡혀가거나 해고되기도 하는 것을 견뎌내려면 지금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 있어도 곧 사회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꿈을 주지 않는다면 힘들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이 작용했겠죠.

A: 후쿠모토주의에 대한 비판 그룹으로써 노농파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발단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사키사카: 잡지 『노농(勞農)』이 나오기 전에 스즈키 모사부로 씨 등을 중심으로 『대중』이라는 잡지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모리 요시타로, 아리사와 히로미, 그리고 야마다 모리타로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노농』이 나온 것은 그 다음입니다. 분명히 몇 명 정도가 노농 동인이 되었지. 동인을 추천하는 과정은, 아무래도 동인의 추천 없이는 안되긴 했지만 관련한 규약은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사카이, 야마카와, 아라하타 간손, 구로다 히사오 씨 등등.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이노마타 씨도 합류했다. 『노농』이 출간된 것은 쇼와 2년(1927년)이지만, 후쿠모토주의와의 논쟁을 통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농파는 극히 미약한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거되고 보니 의외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야마카와 씨가 말씀하셨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약 400명 정도가 검거된 거 아닌가 해요. 그 400명 중에는 좋은 활동가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B: 후쿠모토주의가 대두할 무렵 단일 무산 정당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1928년경에는 무산 정당의 대결집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야마카와 씨 등이 했던 당시의 노농파의 운동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그런 모습(무산정당으로의 대결집 -역자주)이었던 셈인가요?

사키사카: 그렇습니다. 정치 운동으로써는요.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그 무렵 횡단좌익이라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것에 대해 야마카와 씨는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야마카와 씨는 우선 일본대중당을 노동자 대중의 당으로 튼튼히 해야 한다, 그 위에서 어떠한 단단한 결실이 생긴다면 횡단적인 좌익을 거기에서 만들고 일본대중당을 점차 좌측으로 끌고 간다,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A: 그 당시 일본공산당은 러시아식 소비에트 혁명 방식을 유일한 혁명 방식으로 두는 코민테른에서 주어진 테제에 따라, 이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일본을 분석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코민테른이 하나의 세계당이며, 일본은 그 지부라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기에 일본에 대한 분석이 반(半) 봉건적 사회라는 형태가 되었다고 봐도 좋을까요.

사키사카: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은 애초부터 우리나라를 무척 봉건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야마카와 씨의 경우 원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담당되는 것이지만, 제국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에서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에 의해 격렬한 반동화 -사상에서든 제도상에서든-가 일어난다, 이런 반동화에 대한 저항으로써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시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통일전선 -단일 무산정당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 것들의 성장과 저항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게 아니라, 지주로서의 천황제가 있지 않느냐, 러시아의 차리즘과 같은 봉건적인 천황제가 있지 않느냐, 이런 봉건적인 지배세력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본공산당 스스로가 일본을 그런 봉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봉건사회로 보는 태도를 코민테른의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틀린 것 같아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초기 저작에 대한 올바르지 않고 얕은 이해가 일본공산당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본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나 부족한 이해를 초래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분명히 당시 천황제라는 것이 있고, 천황가(家)가 가장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소 지방 산림도 메이지 유신 때 모두 천황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숲이 가장 근대적으로 경영되고 있었습니다. 봉건적 의미에서의 토지 소유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파산한 제15은행의 경우 설립할 때 천황가가 많은 자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천황가가 스스로 현대적인 은행이라는 조직에 들어가 있었고, 때문에 일본의 천황제를 차리즘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공산당이 일본 사회를 반봉건적인 것으로 파악한 기초엔 메이지 유신에 대한 잘못된 분석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사회도 절대주의로 보게 된 것입니다.
사카이 씨와 야마카와 씨 등은 일본의 정세에 대해 공산당이 말하고 있는 것이 오류라며 싸웠습니다만, 코민테른은 사카이와 야마카와는 기회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비판을 한 이면에는 코민테른이 공산당계의 정보만 신용했다는 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죄다 사카이, 야마카와, 아라하타를 적대시하는 보고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야마카와 씨는 한편으로는 그러한 코민테른 대해 무척 비판하면서도 맑스주의, 레닌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카우츠키의 독재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야마카와 씨입니다. 『사회주의 연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카우츠키를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언젠가 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은...


B: 전전의 일본공산당과 노농파의 의견의 차이에 대해 『사회주의』 5주년 기념호의 좌담회에서 야마카와 씨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장문이지만,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하는 야마카와 씨의 발언>

야마카와: 사회주의 사상의 제5차 분화[각주:2]라고 일컫어질 정도로, 마르크스주의 진영 자체의 분열은 우리나라의 운동 사상 최초의 사태일 뿐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은 현재도 일본의 운동을 꿰뚫고 있는 두 개의 두꺼운 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양자의 의견이 대립되는 주요한 점만 살펴봅시다.

1. 볼셰비즘에 대한 평가
공산당 레닌이 마르크스 이론을 발전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볼셰비즘)야말로 맑시즘의 유일한 정통적인 발전이며, 제국주의 단계에 도달한 자본주의 시대의 유일하고 진실된 맑시즘이다. 그리고 이 이론으로 승리한 러시아 혁명의 실천들이야말로 사회주의 혁명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실천들은 보편적인 기준으로써 우리나라의 운동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노농파 레닌주의(볼셰비즘)는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에 적응한 실천 속에서 발전된 이론이며, 따라서 볼셰비즘은 다분히 러시아적 성질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에서 혁명을 성공시킨 승리의 이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즘이 맑시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마르크스의 기본 이론에서 유일한 발전 -유일한 실천상의 결론-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기본 이론을 러시아 혁명의 특수한 조건에 조응시켜 혁명운동의 실천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 나라의 혁명운동은 각각의 혁명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장래에 제정 러시아와는 다른 조건 하에서 달성될 사회주의 혁명은 마르크스 이론의 러시아적 발전인 볼셰비즘과는 다른 혁명 이론을 발전시킬 것에 틀림없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임무는 우리 자신의 혁명적 실천의 이론을 발견하고 확립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특정 시기와 장소의 조건에 조응해 발전한 맑시즘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러시아적 공산주의(볼셰비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처럼 각국의 서로 다른 정당들이 뒤범벅된 것이 아니라, 코민테른 자체가 굳건한 단일한 정당, 즉 세계적인 당이며, 각국의 공산당은 세계당의 집중적인 지휘 아래에 있는 하나의 지부이다. 그리고 전 세계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모스크바의 지령하에 추진되어야 하고,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은 모스크바라는 하나의 지도부의 지휘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노농파 조건이 다른 각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은 그 나라의 토양에 뿌리내려 발생하고 성장한 사회주의 운동의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 책임감 있게 달성되는 것이며, 세계의 한 중심에서 지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주의는 단일한 세계당이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긴밀한 국제 협력에 의해서 성립되어야 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단일당이라는 조직 원리를 채용한 이유 중 하나는 각 국가에 당도 운동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국가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1인터내셔널의 전통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전시기에 걸친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 발전의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3. 정치적, 경제적 분석
전략론의 기초가되는 정치적, 경제적 분석에 대해서도 공산당과 노농파 -어쩌면 코민테른과 노농파라고 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자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이하의 항목들과 같은데요.


4.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략 목표
공산당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천황제라는 형태의 절대주의이며, 일본은 절대주의 국가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정치투쟁의 목표는 천황제 타도이며 프롤레타리아의 전략 목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달성될 때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전략적 목표가 된다. (이 점은 러시아 3월 혁명과 11월 혁명의 관계와 같다. 우리나라의 혁명의 전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당시 2단계 혁명론이라 불리었다.)
노농파 우리의 정치투쟁의 대상은 금융자본・독점자본을 중심으로 결집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 정치 세력이다. 우리나라는 부르주아 정권이 이미 확립된 부르주아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는 천황제를 비롯해 많은 봉건 유물과 잔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천황제 자체도 포함해) 더 이상 독립적인 정치 세력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정치 세력 속에 흡수 또는 동화되어 그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이거나, 혹은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할 도구가 되었다. 지주계급도 어느 정도는 부르주아화 되었고, 부르주아 정치 세력에 맞서는 절대주의의 사회적 기초로서의 지주계급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후 전망되는 혁명(정권의 계급적 이전을 의미하는 혁명)은 부르주아지에게 정권이 이전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대신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획득하는 사회주의 혁명뿐이며, 그 이외의 혁명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략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고, 혁명의 달성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실현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실현이 달성된다.

-나는 이 견해가 완전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무런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어요. 한가지 노농파의 정치분석 속에 산정되지 않은 것은, 패전의 결과 미국의 점령 정책에 의해 일본의 민주화가 진행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점령 정책에 의한 민주화는 우리가 예언한대로, 이미 그 한계에 부딪혀 불철저하게 끝났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점령 정책 자체가 곧 민주화를 역전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 공산당은 똑바로 보고있든 곁눈질을 하고 있든, 어쨌든 어딘가 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2단계 혁명론 등-, 지금의 공산당은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꿈[각주:3] 아닐까', 이렇게 대답해서 박장대소한 적이 있는데요, 솔직히 지금의 공산당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동유럽과 중국에서 인민민주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공산당은 바로 이 새로운 유행으로 옷을 바꿔 입습니다. 다가올 혁명에서 공산당의 임무는 민주민족전선을 만들어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사회주의의 달성으로 전진하는 것'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민민주주의의 길을 통과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 인민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그 권력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며, 여기에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계급적 성격이 있다'고 하니 2단계 혁명론 같기도 하고 1단계 혁명론 같기도 하고, 혹은 신판(新版) 2단계 혁명론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현 단계 전략 목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고, 혁명으로 민족의 해방이 달성되고 그다음이 사회주의 혁명이라면 전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민족해방 혁명만 얹은 2단계 혁명론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수립되는 인민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하니,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의미도 생깁니다. 그런데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가 되는 민주민족전선은 극소수의 '매국적 자본가'를 제외한 중소기업들은 물론, '부유한' 자본가까지도 포함하는 국민적인 통일 전선이기 때문에, 점점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어쨌든 작금의 공산당의 특징은 강도 높은 민족주의이며, 일본에서는 한 줌 매국 자본가를 제외한 전체 부르주아지도 노동자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하는 인민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혁명에 동참한다는 희한한 계급 분석 위에 서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 일본이 아니라, 어디 멀리 식민지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팔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옆길로 샜으니 이야기를 되돌려 봅시다. 다음으로 현재(당시)의 단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예의 '결합 전의 분리'론이 나옵니다.

5. 정당의 조직
공산당 결합하기 전에 먼저 분리하라. 마르크스주의자(이 경우엔 볼셰비즘 추종자)는 볼셰비즘 이외의 이론을 취하는 사람들로부터 깨끗이 분리하여 러시아 볼셰비키식 직업 혁명가의 당을 조직해야 한다.
노농파 일반 대중에게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양자택일은 아직 당면한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대립되는 이해를 가진 모든 사회계층을 반(反)부르주아 전선에 결집시키는 대중적인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정치 운동의 전통과 훈련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이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성질을 갖기 위해 정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우리는 합법적인 무대에서 도피하지 않으며 합법적인 행동 영역을 실력으로 확대해가야 한다. 현재(당시)의 단계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먼저 완수해야 할 임무는 이같은 정당조직 -즉 반(反)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결집- 과 성장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정당의 투쟁 속에서 대중에 밀착하며 지도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6. 무산 정당들에 대한 태도
공산당 공산당 이외의 노동자 농민 정당(무산 정당)들에 대한 공산당의 태도는 3개의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무산정당 수립 운동 단계에서는, 무산정당은 반(反)부르주아적 작용을 갖는 일체의 요소를 포함하는 공동전선적인 성질을 가진 정당이어야 한다는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전국적인 단일 정당의 실현에 협력했다. 노동농민당이 공산당의 외곽조직적인 성격을 띠게 된 두 번째 단계에서는 공산당은 노동농민당 이외의 무산정당을 부르주아의 앞잡이 당으로 배격하고 그들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노동농민당을 공산당의 외곽조직으로 보아 해산명령이 내려진 후의 세 번째 단계에서는 공산당은 불법화된 공산당 이외의 일체의 합법적인 정당을 원칙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그런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부르주아의 앞잡이 당이라는 증거라 주장했다.
노농파 무산정당 수립 운동 이후 공동전선적인 성격을 띤 단일 무산정당의 실현을 주장했다. 많은 무산정당이 분립한 시기에는, 이러한 모든 정당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단일한 반(反)부르주아 전선에 조직될 수 있는 사회적 요소로부터 성립된 것으로 보고, 무조건적으로 통합하는 운동을 추진했다.

7. 노동조합의 조직
공산당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있던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에 속하는 별개의 노동조합, 즉 우익적인 노동조합에 맞서는 좌익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이른바 이중 조합주의를 취했다.(이렇게 '결합 전의 분리'론이 조합 운동 속에도 반입되었다.)
노농파 이중 조합주의를 배격하고 노동조합 운동의 전선 통일을 강하게 주장했다. '노농'은 '종파적 분열주의와의 투쟁', '정치적 통일 전선의 형성'과 함께 '조합운동의 전국적 통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다.

8. 노동조합 운동들에 대한 태도
공산당 다양한 기회를 통해 노동쟁의를 격발시키고, 하나하나의 쟁의를 단순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적인 정치투쟁(국가 권력 탈취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모든 노동쟁의는 이 같은 관점에서 지도되어야 하고, 쟁의의 성과도 혁명의 예행연습으로서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 운동이 조합주의, 경제주의를 지양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치투쟁으로 전면적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농파 조합주의적 의식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정치 의식으로의 발전이란 개개의 노동쟁의를 혁명적인 정치투쟁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계급의 의식과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 투쟁의 단계로 발전함으로써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이 불필요하게 되거나 의의가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투쟁과 일상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과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구별하려 해선 안된다.
(『사회주의』 5주년 기념호, 1956년 10일 「일본의 사회주의(1) 50년의 발자취」 좌담회에서) 이상 야마카와 씨의 발언




사키사카: 노농파도 반드시 맑시즘의 전체 이론 분야에서 완전히 일치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와 스즈키 모사부로는 이 점에서도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와 저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났었습니다. 그가 중앙공론사에서 낸 '유물변증법 독본'은 꽤 팔린 책인데요, 나는 종종 그의 집필에 협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일치한 곳은 없어요. 저희 둘은 자주 토론을 하곤 했지만 끝무렵에는 일치해 있었습니다. 오모리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원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쿠와키 겐요쿠 씨(문학부 철학과 교수)의 세미나에 간다,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와의 첫 논의는 나의 소박한 유물론과 그의 칸트적 관념론의 충돌이었습니다. 이게 1923년입니다. 이때부터 그와의 친밀한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1925년에 베를린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훌륭한 사회주의자이며 유물론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와 나는 생각도 행동도 서로 같았습니다.
맑시즘과 레닌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모리는 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마카와 씨와는 이 점으로 충분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항상 하나의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야마카와 씨의 의견과 꼭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라는 것입니다. 운동상으로는 야마카와 씨의 지도에 불안을 느끼진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의 정통 후계자가 레닌인 것에 대해 꼭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1932년 2월 「레닌 전(傳)」을 냈습니다. 1931년에 구게누마에서 출판한 책입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이 새로운 시대(제국주의 시대)에 레닌의 이론에서만 제대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한 때부터 노농파의 일원이 된 때까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레닌의 이론을 맑시즘의 유일한 정통의 적자라고 생각합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실현을 지도했습니다. 그 싸움의 전략과 전술은 물론 러시아의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적용한 맑시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조건에만 맞는 것을 일본에 적용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을 관통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에 관한 한 올바른 맑시즘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이론이다. 이 일반성이, 내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이다. 나는 이 점에 관한 한 지금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이론, 세계관을 일본의 역사,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이론,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적용하는 경우, 우리는 어깨 위에 머리를 얹은 사람으로서 독자적인 이론과 사회주의자로서의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성은 특수성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이론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야마카와 씨가 '볼셰비즘에 대한 평가' 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노농파에 들어간 때부터 오늘까지 야마카와 씨와 완전한 일치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임무는 우리 자신의 혁명적 실천의 이론을 발견하고 확립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특정 시기와 장소의 조건에 조응해 발전한 맑시즘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러시아적 공산주의(볼셰비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야마카와 씨가 말씀하신 것은 물론 찬성입니다. 다만 나는 "마르크스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와 레닌으로 돌아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인용된 야마카와 씨를 중심으로 한 좌담회 석상에서도 이런 내용의 제 의견을 피력했고, 그리고 야마카와 씨는 내 의견에 찬성을 표했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좌담회의 기록에는 그것이 실리지 않았네요.
동시에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야마카와 씨는 조금도 반(反) 레닌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레닌주의는 러시아에서 왜곡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에 올바르게 적용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레닌주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코민테른에 대해서도 이들의 지도 방법에 이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주의는 단일한 세계당이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긴밀한 국제 협력에 의해서 성립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마카와 씨의 의견 중에는 코민테른 성립의 시대(1919년 창립 대회)에는 유럽, 독일이 직접적으로 혁명 정세에 있었다는 것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야마카와 씨의 코민테른 비판에 그대로 동의하진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이노마타 씨에 가까웠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도 이노마타 씨와 토론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초기에는 세계 최초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생긴 사람들 마음의 혼란이나, "혁명가"라고 칭해지는 인간의 조잡한 사고가 야마카와 씨에게 불신감을 안긴 적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공산당원 가운데 이런 인물을 발견했던 것도 야마카와 씨의 불신을 강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항상 자신을 올바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 두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공산당의 데마고기를 비판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반공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야마카와 씨는 공산당의 데마고기를 비판하면서 항상 마르크스와 레닌의 올바른 이론을 지속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야마카와 씨의 냉철한 성격에 감탄했고, 사회주의자로서 한층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 이노마타 츠나오(猪俣津南雄) [본문으로]
  2. 이 시대에 이르러 사상의 분화는 동시에 운동의 분화로 이어지는 성질이 점점 짙어지는데, 이는 1925년경에 시작해 1927년에 결정적으로 되었다. 코민테른이 지휘하는 일본공산당과 이에 대립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분화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관지의 이름을 따 "노농"파라고 불리었다. [본문으로]
  3. 일본어의 夢を見る는 직역하면 '꿈을 보다'라는 뜻이지만 '꿈을 꾸다'는 의미로 쓰인다. -역자 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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