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구조개혁론
- 오시오 헤이하치로
- 강좌파
- 평화헌법
- 전공투
- 니혼대 투쟁
- 일본에서의 사회주의에의 길
- 도쿄대 투쟁
- 구조개혁파
- 안보투쟁
- 일본사회당
- 사회민주주의
- 일본 녹색당
- 일본 공산당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 노농파
- 제국주의
- 에다 사부로
- 스즈키 모사부로
- 사이토 코헤이
- 일본 사민당
- 정의당
- 일본형 사회민주주의
- 일본 좌파
- 후쿠시마 미즈호
- 중핵파
- 인신세의 자본론
- 일본 사회당
- 일본 정치
- 야마카와 히토시
- Today
- Total
방구석 룸펜
일본형 사회민주주의의 형성 -1920년대 전반의 야마카와 히토시- (요네하라 켄) 본문
일본형 사회민주주의의 형성
-1920년대 전반의 야마카와 히토시-
요네하라 켄(米原 謙)
초록
일본형 사회민주주의란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과 같은 서구 사회민주주의, 볼셰비키와 같은 전위당을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며 민주주의의 확충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려 하는 사상이다. 이것은 1920년대 야마카와 히토시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야마카와는 1920년대 초에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지했고, 1차 일본 공산당의 이론적 중심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점차 일본의 혁명은 러시아와 서구 국가들과 다른 길을 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소부르주아를 포함하는 '협동전선'을 주장하며 전위당과 같은 사상을 비판하게 된다.
서론
야마카와 히토시(1880-1958)의 정치적 입장은 종종 '야마카와주의' 혹은 '노농파'라 불리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각각 '후쿠모토주의', '강좌파'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써 이해해야 하므로, 본고는 그의 정치사상을 '일본형 사회민주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주지하듯 사회민주주의란 제2 인터내셔널에서 기원하여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대립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했고, 종국에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분리된,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지향하는 노선을 가리킨다. 일본형 사회민주주의란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개념을 견지하면서도 코민테른이나 공산당과는 선을 긋는 견해를 의미한다. 이 사상은 레닌의 '전위당' 조직 형태에 부정적이고 대중적 당 조직을 기초로 삼는다는 점, 사회주의 혁명에서의 폭력의 필요성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최소한으로 억지하려는 지향을 가진 점 등에서 공산당과 다르다.
야마카와는 이러한 사상적 입장을 1926년부터 이듬해에 거쳐 이뤄진 일본 공산당 재건, 후쿠모토주의와의 대립, '노농' 창간을 거쳐 확정해가는데, 이에 이르기까지 수년에 걸친 시행착오의 기간을 겪는다. 본고가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시기로, 구체적으로는 러시아 혁명과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비판에 관한 고찰, 제1차 공산당의 결성과 해산, 보통선거를 목전에 두고 이뤄진 무산정당 결성을 둘러싼 논쟁 등을 주제로 한다. 이 시기의 야마카와의 주장을 결코 일관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 고찰의 과정 속에서 일본형 사회민주주의로 향하는 착실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1. 러시아 혁명론
비단 야마카와뿐 아니라 사회주의자에 있어 러시아 혁명이 압도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야마카와는 이러한 양태를 ‘나는 그즈음 아라하타군과 함께 하고 있던 노동조합 연구회에서 러시아 혁명 얘기를 했었는데, 눈물이 나와서 말을 잇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감격적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야마카와 자신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특별한 정보원은 없었고 그 근황은 신문의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론적인 것은 미국에서 귀국한 콘도 에이조우에게 받은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책은 ‘フレーナー’라는 인물이 ‘레닌의 저작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훌륭히 편집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라는 표제’로 출간한 책이었다고 한다.
야마카와의 자서전은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일관되게 소극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특별한 정보원 등은 없었다는 서술의 신빙성은 이를 참작하고 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콘도 에이조우 자서전”에 따르면 콘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919년 5월 귀국한다. 콘도는 귀국 후 곧바로 고지마치 6정에 있던 사카이 토시히코를 방문했고, 이후 수일 뒤 사카이의 소개로 야마카와를 만나러 갔다. 여담으로 야마카와와 콘도는 제1차 공산당 시대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측면 때문에 콘도의 태도에서 야마카와의 사상가로서의 민낯을 엿볼 수 있으므로 인용해본다. ‘사카이는 확실히 정치가 타입이지만 야마카와는 명확히 학자풍이었고, 굳이 말하자면 성인聖人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병약했기 때문인지 어두운 분위기가 항상 따라다녔다. 웃음에조차 고통이 있었다. 이후 상당히 긴 기간 교제했지만, 사카이의 커다란 입에서는 쉽게 터져 나오던 폭소를 야마카와의 입에서 들어본 적은 없다. 애초에 야마카와의 입은 생리적으로 크고 거리낌 없이 열어젖히는 것이 불가능한 입인 모양이다. 역시나 야마카와 키쿠에 여사와의 첫 대면의 인상 또한 어둡다.’
야마카와가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의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 책은 아마 야마카와가 술회한 제목과는 다른 Louis C. Fraina 편저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Russia, by N. Lenin and Leon Trotzky, New York, The Communist Press, 1918.”일 것이다. 프레이너(1892-1953)는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로, 가타야마 센을 비롯한 미국 주재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상당히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이런 고로 콘도로부터 야마카와에게 이 책이 전달된 것이다. 야마카와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러시아 혁명 발발 초기의 레닌과 트로츠키 등의 발언을 시계열적으로 나열해 편집한 책으로, 450여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미국, 러시아, 영국에서 발표된 레닌과 트로츠키의 연설, 논문, 팜플렛 등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에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로 유명한 존 리드가 제공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보겠다. 전체는 서문, 프레이너의 서문이 포함된 7개의 장,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레이너는 서문에서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여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주의의 세계혁명의 시작을 의미한다며 그 획기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경험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제를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정부형태로 대체하여 창출해냈다고 말한다. 본문 7개 장과 부록의 개요는 이하와 같다.
제1장 ‘혁명의 제1단계’(1917년 3월 이른바 2월 혁명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과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시기. 귀국 이전 레닌의 연설과 논문 4편 수록)
제2장 ‘볼셰비키의 개괄적 프로그램’(카우츠키를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의 전쟁에 대한 태도를 비판한 ‘사회주의와 전쟁’ 등 혁명 이전 레닌의 논문 2편을 포함한 전 8편을 수록)
제3장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1917년 6~7월의 ‘이중권력’ 상황에서의 레닌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혁명의 교훈’ 등 팜플렛 6편과 트로츠키의 논문 4편을 수록)
제4장 ‘위기에 부딪힌 혁명’(혁명반동기인 8월 트로츠키의 팜플렛 6편을 수록)
제5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코르닐로프 반란부터 제헌의회 해산에 의한 볼셰비키의 권력 획득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프레이너의 논문 4편)
제6장 ‘평화를 둘러싼 혁명적 투쟁’(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시기. 1918년 2~4월의 트로츠키의 팜플렛과 연설 6편, 레닌 논문 2편 수록)
제7장 ‘소비에트 공화국과 그 제 문제’(1918년 5월 초 “프라우다”에 발표된 레닌의 논문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신질서와 구질서’ 등 5편을 수록)
부록 ‘국제관계’(치체린의 논문 3편, 레닌, 치체린, 트로츠키의 이름으로 제출된 연합국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한 선언 및 레닌의 연설 1편. 모두 1918년의 것이다.)
이상의 개요에서 알 수 있든 이 책은 2월 혁명부터 1년여의 격동의 기간을 혁명 당사자인 레닌과 트로츠키의 문장을 중심으로 채록하여 전달한 것으로, 혁명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시의적절한 내용이었다. 부록에 실린 최신 문서는 1918년 10월 하순의 것이므로 이 책은 이르면 연말쯤 출판되었을 것이다. 야마카와가 콘도와 만난 것은 1919년 5~6월이므로 그는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책을 손에 넣은 것이다. 아마 야마카와는 1919년 후반에는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한 야마카와는 곧바로 달려 나가지 않는다. 이 시기 그가 발표한 것은 ‘러시아 혁명과 농민 문제’(“신사회” 1918년 6월호), ‘레닌과 트로츠키’(7월호), ‘러시아 혁명의 과거와 미래’(8월호) 등인데, 뒤의 두 논문은 ‘핀란드 인민공화국 임시정부의 주미 대표 サンテリ・ヌウルテヴァ’라는 인물의 글을 소개한 글인 등, 모두 소개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야마카와가 러시아 혁명에 관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견해를 발표한 것은 1920년 “사회주의 연구” 6월호에 게재된 ‘소비에트 정치의 특질과 비판’에서이다. 애초에 이 논문은 1919년 12월 집필되었으나 어떠한 사정으로 ‘십수 개 부분’을 삭제하고 ‘전체적으로’ 다시 집필했다고 한다. 논문은 ‘누구나 러시아의 혁명을 비난할 순 있다. 그러나 누구도 러시아 혁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보다 ‘범위가 더욱 넓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더욱 깊다’라고 했던 프레이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야마카와는 1919년의 최신 자료도 참조하는 등 러시아의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논문의 부제가 ‘프롤레타리안 딕테이터십과 데모크라시’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야마카와는 이 논문을 통해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발생한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을 논한다. 물론 야마카와는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주로 코민테른의 제1회 대회(1919년 3월) 레닌의 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와 보고’를 채용했다. 그 밖에 레닌의 ‘민주주의와 무산계급의 독재정치’, ‘구질서와 신질서’, 트로츠키의 ‘민주주의의 원칙과 무산계급의 독재정치’ 등을 인용하는데, 이 중 레닌의 글은 앞서 말한 프레이너의 저서에 포함되어 있었던, 원래는 레닌의 ‘소비에트 권력의 당면한 임무’(1918년 4월)에 포함되어 있던 글들이다.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은 위에서 언급한 레닌의 ‘민주주의와 무산계급의 독재정치’에 요약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여기에 옮기겠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는 두 가지 이유로 독재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착취자들의 저항을 남김없이 억압할 필요가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소부르주아와 결탁한 구질서의 퇴폐적인 요소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철완(iron hand)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금 러시아에 닥친 재난은 기아와 실업인데, 이는 조직과 규율의 결여에서 기인한 것이고 이러한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소부르주아의 무정부성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개인의 독재는 모순되지 않는다. 첫째로, 부르주아 독재와 달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당하는 다수를 위해, 착취하는 소수를 향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둘째로, 사회주의적 생산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결합하는 의지를 엄격하게 통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지도자들의 단일한 의지로 노동과정을 통일하고 대중이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소부르주아의 방종과 무질서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규율에 대한 각종 공격을 극복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10월 혁명 직후부터의 급격한 국유화 정책에 의해 사실상 대기업 생산은 중단됐고 경제질서는 극히 혼란스러웠다. 생산 유통과정을 지배한 것은 농민과 소상공업자였다. 교통은 혼란스러웠고 식량 위기가 발생했으며 암거래, 투기, 뇌물이 횡행했다. 레닌이 ‘소부르주아의 방종과 무질서’라 부른 것은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사태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니 생산유통과정에 질서를 되찾기 위해서는 ‘한 명의 의지’에 이의 없이 복종하는 ‘철의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야마카와는 이러한 레닌의 설명을 혁명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소신사 파벌에 대한 강제력으로써의 독재정치’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민주주의와 배반되지 않는다는 레닌의 설명에는 여전히 전면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논문의 끝에서 야마카와는 이렇게 말한다. ‘레닌의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치”는 어쩌면 그릇된 사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이를 그릇된 사상이라 단정 짓는다고 해도, 이 그릇된 전제 위에서 러시아의 혁명을 건설하고 있는 레닌의 재간을 경이로워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비판이 이론적으로 올바르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현실적 필요에 따라 이른바 임시방편으로써 독재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마카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2. 카우츠키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타당성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야마카와는 카를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를 저울의 반대편에 놓고 그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말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도 교류했던 사회주의자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중진으로써 활약함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이론 활동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 등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해설서로써 1920년대 일본에서 널리 읽혔다. 그는 20세기 초 서유럽의 최고 마르크스 이론가 중 하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레닌이 쓴 카우츠키 비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였다. 레닌은 이미 “제국주의론”과 “국가와 혁명” 등 다양한 저작에서 카우츠키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었는데, 1918년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서 볼셰비키 비판을 전개한 것에 관해 위의 책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하게 된다.
스틴슨 저 “카를 카우츠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1918년 초 작성된 논문을 종합한 것으로, 1918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조금씩 표제와 내용이 바뀐 ‘최소한 5가지의 서로 다른 판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스틴슨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파악했다. 즉 러시아 혁명은 봉건적 유산을 타파하고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어냈고, 모든 계급에 정치적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 사회의 자본주의 경제가 뒤쳐진 상태라는 것을 무시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수단을 통해 무턱대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볼셰비키의 수법을 카우츠키는 비판했다.
카우츠키의 볼셰비키 비판은 어느 정도는 ‘수레를 가로막은 사마귀’에 비유할 수 있었다.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주류파의 지위를 잃고 오랜 기간 주관했던 “노이에 차이트Neue Zei”의 편집권도 상실한 상태였다. 한편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고 혁명가로서 종횡무진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회주의자에 있어 소비에트 러시아와 레닌은 인류의 미래를 가리키는 혜성과 같은 존재였지만, 카우츠키는 너무나 조산(早産)해버린 그 사회주의가 조만간 붕괴할 것으로 보았다. 물론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사정이 확연히 다르다. 카우츠키가 예언했던 만큼 이른 시기는 아니었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결국 붕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인민의 자유를 희생했다는 사실은 그가 제기한 문제가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 결점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있어 카우츠키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던 야마카와는 레닌과 카우츠키의 대립을 어떻게 파악했는가.
앞서 언급한 논문 ‘소비에트 정치의 특질과 비판’을 발표하고 반년이 넘은 1921년 3월 발간된 “사회주의 연구”에 야마카와는 ‘카우츠키의 노농정치 반대론’을 게재한다. 이 논문은 앞서 언급한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중 한 장인 ‘독재정치(dictatorship)’를 번역하고 이에 상세한 역주를 단 것으로, 야마카와 자신의 카우츠키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논문이다. 역주의 대부분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배신자 카우츠키”에 기초해 있으므로 야마카와가 기본적으로 레닌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야마카와는 카우츠키의 비판이 ‘마르크스 이론적 입장’에 선 ‘최고의 비평’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레닌을 지지했다.
이 논문을 집필할 즈음 야마카와가 사용한 카우츠키의 책은 본문에서 ‘지배’, ‘통치’에 ‘rule’, ‘govern’등의 표기가 쓰인 것으로 볼 때 영역본이었다고 생각된다. 야마카와는 카우츠키의 책이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적고 있으나,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판인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translated by H. J. Stenning, The National Labour Press는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마카와가 사용한 책과 다른 책일 수 있으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보겠다.
제1장 ‘문제’는 러시아 혁명과 파리 코뮌은 서로 다르고, 다른 사회주의 정당(구체적으로는 멘셰비키와 사회역명당을 지칭)을 배제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문제의 근간은 민주주의라 지적한다. 제2장 ‘민주주의와 정치권력의 장악’에서는, 목적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을 폐지’하는 것에 있으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즉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제3장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성숙’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은 대중운동이며 민주주의를 전제한다고 논한다. 즉 대중은 비밀리에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비밀조직은 개인 및 리더 집단에 의한 독재를 잉태하고 대중의 자치와 독립을 촉진시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제4장 ‘민주주의의 효과’는 ‘일계급은 지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통치할 순 없다’라고 설파한다. 그 이유는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직뿐이며, 민주주의에서 통치는 정당에 의한 것임에 비해 계급은 형태가 없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계급의 이해관계는 다양하므로 그것은 복수의 정당에 의해 표현되기도 한다. 또 소수파로부터 새로운 사상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므로 소수파를 억압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니 소수파를 보호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지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제5장 ‘독재’에서는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언급한 과도기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부 형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한 순간 생겨나는 ‘상태’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의 “프랑스에 있어서의 내전” 서문에서 엥겔스가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코뮌이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민주주의의 정지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용법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단순한 ‘지배자의 상태’가 아닌 ‘정부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개인 혹은 조직의 독재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의한 독재가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복수의 정당으로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것은 한 정당의 다른 정당에 대한 독재가 된다. 제6장 ‘제헌의회와 소비에트’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 설명한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는 당초부터 농민의 대표인 사회혁명당과 마르크스주의자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 후자는 러시아의 현 상황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멘셰비키와 ‘의지와 힘의 전능’을 믿고 러시아의 후진성을 무시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볼셰비키로 분열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서구의 혁명을 예상하며 무조건적 강화를 실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고, 제헌의회를 해산하여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제7장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는 소비에트에서는 적대적인 비판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 구성원의 다수가 농민과 병사라는 점, 선거권은 노동하는 자에 한해 주어지지만 그 규정은 매우 애매하고 자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권력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제8장 ‘교훈’은 자본주의 생산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의해 프롤레타리아가 성숙해가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적 생산이 자본주의와 별반 다를 바 없게 된다는 점, 러시아에는 이러한 성숙을 위한 조건이 없는 점을 지적한다. 제9장은 (a)농업과 (b)공업으로 러시아의 상태를 나누어 분석하는데, 러시아는 자본가의 재산을 파괴하고 자본가를 노동자로 만들었지만 사회주의적 생산 시스템을 확립하지 못했고, 조만간 노동자와 지식인이 자본가가 될 것이라 지적한다. 제10장 ‘새로운 이론’에서는 이론적으로든 러시아의 현 상황에 비추어보든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에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 서술하며 볼셰비키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반하는 것이라 단정하고 있다.
카우츠키와 레닌의 이론적 대립을 야마카와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위에서 소개했듯 카우츠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비판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야마카와는 제5장(본인이 인용한 간행본 기준) ‘독재’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으므로 논점은 어느정도 한정된다. 카우츠키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적 생산 시스템의 본질적 기초다’라고 서술하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야마카와는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성숙의 조건이라는 카우츠키의 주장을 들어 이것이 권력 장악 이후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을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비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무산계급이 계급투쟁을 위해 정치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해서 권력 장악 이후에 반대 계급에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우츠키는 독재 일반과 민주주의 일반을 대립 개념으로써 파악하고 있는데, 문제는 무산계급이 권력 장악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지할지 말지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 담긴 논리를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레닌의 주장은 이하와 같다. 카우츠키는 일반적인 개념으로써의 ‘민주주의’와 ‘독재’, 즉 ‘무산계급, 초계급적’인 ‘민주주의’와 ‘독재’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순수’한 ‘형식적’인 민주주의라는 사고방식은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의 이익이 우선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의 견해’이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과도기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인정했다. 카우츠키는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투쟁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현실의 혁명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란에 있어서의 ‘무자비한 적’과 외국에 의한 혁명에 대한 간섭이다. 이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로부터 폭력을 통해 쟁취해낸, 어떠한 법률로도 구속되지 않는 권력이 필요하다. 이상의 레닌의 주장을 야마카와는 추인한 것이다.
야마카와가 가진 또 하나의 논점은 카우츠키가 말한 ‘상태’로서의 독재와 ‘정부형태’로서의 독재의 구별이다. 카우츠키는 자유로운 선거 결과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나머지를 배제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하는(지배의 형태) 것은 좋지만, 다수파로서 권력을 장악한 무산계급이 소수파로부터 선거권 등 권리를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며 권력을 행사하는 것(정부형태)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카우츠키는 무산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 이후에도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야마카와는 무산계급의 이익을 실현하고 그 의지를 강제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인정한다면 그 방법으로써 ‘형식적 민주주의’를 존속시킬지 여부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파리 코뮌에서는 선거의 자유가 인정되었다는 카우츠키에 반해 당시 부르주아지는 파리로부터 도주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기의 보통선거에는 무산계급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노농 러시아에 있어서도 무산계급 사이에는 보통선거 위에 선 민주주의가 철저하게 실행되고 있다’라고 야마카와는 주장한다.
레닌과 카우츠키의 관점의 차는 명확하다. 레닌은 부르주아지의 부, 조직성, 지식의 우위를 빼앗지 않는 한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유지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내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사회주의 혁명 단계가 아니며, 우선 민주주의를 충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혁명가와 이론가의 대립일 뿐 아니라, 권력은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혁명관과 민주주의의 성숙에 의해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권력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보는 혁명관의 대립이었다. 카우츠키의 혁명관은 분명 과하게 낙관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계급 내부의 일부에 의한 다른 일부에 대한 전제적 지배가 되고 그것이 내란이나 군사적 지배를 촉발하여 민주주의가 폐기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우려를 야마카와는 인식하지 못했다. ‘카우츠키의 박학다식한 머릿속에서 무산계급 독재라는 개념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훌륭하게 치환되어 튀어나왔다’라는 야마카와의 비판은 레닌과 마찬가지로 카우츠키를 평범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도로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잡지 “해방” 1922년 2월호와 3월호에 카우츠키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계급독재와 정당독재’라는 두 가지 논문이 번역 게재되었다. 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보다 설명은 조잡하지만, 민주적 수속(형식적 민주주의)의 중요석을 지적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지에 의한 지배의 도구로써만 이해하는 것은 오류라는 논지에 변함은 없다. 카우츠키는 레닌 등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볼셰비키의 지배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된 것으로,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는 것은 ‘허위’이다. 처음에는 자본가와 지주를 향해 행사할 생각이었던 독재는 곧이어 프롤레타리아를 향하게 되었고, 이는 점점 가혹해지고 있지만, 역으로 자본가에게는 여의치 않고 타협하고 있다. 이 비판은 1921년 볼셰비키가 채용한 신경제정책(NEP)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야마카와는 이에 대해 ‘부르주아 독재의 변’(“사회주의 연구” 1922년 4월호) 집필을 통해 카우츠키의 민주주의 개념은 칸트의 ‘물자체’와 닮아 있고, 개념화할 수는 있어도 현상으로써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와 근데 민주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민주주의의 국가 제도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공원의 벤치, 혹은 어떠한 술이든 담을 수 있는 ‘무색무취의 유리병’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 하의 계급투쟁은 현재의 국가제도를 기초로 하여 그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부르주아로부터 프롤레타리아로의 권력 이행이 실현된다. 여기서는 사실상 ‘혁명’은 부정되고, 카우츠키는 과거 스스로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과 유물사관을 버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되어 버렸다, 라고 야마카와는 결론짓는다.
야마카와의 비판은 다소 성급한 것이다. 그는 이 문장에서 앞서 언급한 ‘소비에트 정치의 특질과 비판’에서도 인용된 코민테른 제1회 대회(1919년 3월)의 레닌의 ‘보고’도 언급한다. 여기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항상 약속하지만 실행한 적은 없는 ‘성, 종교, 인류,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시민의 평등’을 ‘소비에트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거에 완전히 실현한다’. 야마카와는 레닌의 문장을 인용하며 ‘소비에트 제도가 실제로 레닌이 주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는지에 관한 실제적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하략)’라며 중대한 유보를 단행하며 레닌이 결코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를 돌린다. 이러한 서술의 배경에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러시아적 형태이다’라고 언급한 사실이 있을 것이다. 즉 권력의 이행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피하고, 착취계급에 대해 ‘순수한 민주주의’를 제한할 필요가 있지만 어디까지 제한할지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상이하다. 예를 들어 선거권의 제한은 ‘순전히 러시아적인 문제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일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레닌 또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야마카와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다음 절에서 검토해보자.
3.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일본의 혁명
3.1 신경제정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앞서 언급했듯 혁명 초기 레닌은 생산력의 회복과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일상적 노동규율’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농민과 중소상공업자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적 방종과 무정부주의적 자연발생성’을 엄격하게 규탄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무엇보다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무조직상태’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써 설명되었다. 그러니 야마카와는 앞선 ‘소비에트 정치의 특질과 그 비판’에서 혁명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였고 부르주아 대신 ‘중간계급과 소신사 파벌적 지식분자’가 ‘가장 두려운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레닌이 이 ‘소신사 파벌의 적극적 반동’과 그 사상 및 환경을 타파하는 것을 ‘과도기의 독재정치를 변호하는 주요한 한 이유이다’라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지식계급의 지위’(1920년 8월)에서는 이 의논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마르크스의 설명과 달리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불균형하게 팽창한 유식 중간계급의 존재’가 주목받으며 수정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 노동조합의 동향을 살펴보면, 세계대전의 결과 중간계급은 팽창한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 심리의 동요’와 ‘육체노동자의 해방운동과의 접근’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이 중간계급의 분해라고 하는 경향이 어디까지 나아갈지는 불확실하지만, 만약 그것이 더욱 나아간다면 ‘정력적인 낭비와 비참한 희생’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즉 마르크스가 설명한대로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중간계급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분해되어버린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필요하게 된다. 이 당시 야마카와는 러시아 혁명을 ‘사회적 혁명의 필연이 중간계급의 분해를 가져오지 못한 실제 예’라고 파악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중간계급의 분해를 완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야마카와가 레닌은 자본주의의 객관적 발전 단계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혁명에 맹목적으로 돌진했다는 식의 카우츠키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야마카와는 레닌을 ‘혁명의 심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았다’, ‘자신을 믿지 않고 그저 민중의 창조력을 신뢰했다’라고 평했다. 여기에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가 역사의 필연에 따라 행동했다는 인식이 있고, 사회주의 혁명은 반드시 자본주의의 충분한 발전 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고가 있었다. 이 문제는 러시아 정도는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했다고 할 수도 없는, 소작농이 사회운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혁명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야마카와의 일본 혁명의 구상을 검토하기 전에, 야마카와가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1921년 3월 러시아 공산당 제10회 대회는 이른바 신경제정책으로의 이행을 결정했다. 야마카와의 논설 ‘마르크스 이론을 통해 본 러시아의 신경제정책’(1922년 3월)에 따르면 그것은 ‘무산계급 독재 하에 일정한 제한 아래에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것은 농민의 토지 소유와 시장을 통한 잉여 농산물 판매, 시장을 통한 소공업의 생산물 매매를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목적이었던 소부르주아의 억압이 아니라 그 존재를 공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야마카와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야마카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신경제정책은 사회주의 실현의 단념이 아니라, 러시아의 ‘소산업을 즉히 사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즉 러시아에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같은 대기업은 발달하지 않았고, 부르주아지의 세력은 약했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뤄졌던 원인이지만, 역으로 소부르주아의 세력이 ‘예외적으로 강대’했으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부르주아 경제를 분쇄하기 위한 싸움’이 되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생산을 한번에 파괴하는 것은 국가경제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공업의 발달에 연계하여 점차 소부르주아 생산을 소멸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대공업(레닌은 이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른다)의 발달에 의해 차차 소부르주아 생산을 극복해가는 것이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화의 길이다.
응당 신경제정책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 설명으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소부르주아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에 대한 억압이 근거였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고, 새로운 근거가 필요하게 된다. 야마카와는 비록 이 점에 관해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그의 문제의식 깊숙한 곳에서 이 성가신 문제가 그를 바늘처럼 찌르고 있었을 것이다.
‘무산계급의 독재냐 공산당의 독재냐’(1921년 9월)에서는 ‘소비에트’라는 제도가 종래의 사회주의와 상이한 볼셰비즘의 특징으로,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실행적 사회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비에트야말로 ‘무산계급 독재의 기관’이며, 여기에는 ‘무산계급 내부의 계급적으로 각성한 부분만’이 대표된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가령 무산계급이라 할지라도 계급의식이 지연된 부분의 의견은 소비에트에 반영되지 않게 된다. 당연히 소비에트에 있어서 공산당이 리더십을 쥐게 되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현실이 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 ‘러시아의 현상’은 ‘애완愛玩 이상’을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재료로 삼아 사회의 새로운 조직을 쌓아 올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러시아는 공산당의 독재인가?’). 야마카와는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어느 정도 회의적이고 제한적이었던 당초의 태세를 완전히 버리고, 러시아 혁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3.2 ‘방향전환’론
‘마르크스 이론을 통해 본 러시아의 신경제정책’을 발표한 1922년 3월, 야마카와는 다른 잡지에 ‘보통선거와 무산계급의 전술’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논문을 발표했다. 보통선거제 실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산계급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명백하게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기권’ 전술을 취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이다. 이 논문은 야마카와가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최전선에 서 있었음에도 동시에 아직은 생디칼리즘적 색채를 짙게 남겨뒀다는 점에서 알려져 있다.
야마카와에 따르면 의회를 계급투쟁의 무대로 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성숙되어 있을 필요가 있지만, 일본은 장래에 그러한 조건이 없을 것이므로, 선거 참여는 ‘무산계급 운동이 의회주의에 의해 거세되어버릴 위험’을 가진다. 이 논설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자유주의 단계로부터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근래에 권력을 쥔 일본 부르주아지는 ‘점차 반동화’될 것으로, 그 정치형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가장 노골적인 독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러한 단정의 근거는 러시아와 독일의 사례에 있다.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을 통해 불충분하기는 하나 민주주의가 성립되었지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확립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돌진했다. 한편 독일의 무산계급은 1918년 수립된 정부에 협력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야마카와는 이 두 국가의 예로부터 ‘무한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동일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완성한 후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볼셰비키의 전략은 ‘반동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례는 자본주의의 특징적인 발전의 결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경과하지 않고, 혹은 이를 ‘축약하여 급속해 통과’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일본도 러시아의 사례를 따라야 한다고 야마카와는 생각했다. 선거 기권 전술은 일본의 무산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볼셰비키가 취한 전략을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야마카와의 상황 판단과 혁명 구상은 이 시기 정치사에 관한 상식에서 볼 때 상당히 기묘하다. 연호가 다이쇼로 바뀌는 1910년대 초부터 민중운동이 고양되었고, 헌정옹호운동에 의해 제3차 내각이 붕괴되었다(1913년 2월). 이후 논단에서는 민본주의가 한창 주장되었고, 쌀소동 등 격렬한 반정부 운동의 결과 보통선거제 도입과 본격적인 정당정치가 이뤄지는 분위기가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야마카와는 이러한 다이쇼 시기의 자유주의 조류와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주지하듯 1921년부터 1922년은 제1차 공산당이 창당되던 시기이다. 제1차 공산당 결성에 관한 관계자의 발언은 대부분 재판정에서의 증언이나 2차대전 이후 회고를 통해 이뤄지고 있으므로 세부적으로는 뒤섞인 연구와 논쟁이 이뤄졌다.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 문제에 깊숙이 들어갈 수 없지만, 적어도 개념은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야마카와는 전후 “자전”에서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이 주최한 극동제민족대회가 개최되는데, 일본도 대표를 보낸다. 대회는 결국 이르쿠츠크가 아닌 모스크바에서 이뤄졌고, 여기서 코민테른과 카타야마 센이 접촉하고, 일본에서 공산당을 건설하라는 ‘지령’ 혹은 ‘제안’을 받는다. 여기서 주요한 인물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공산당을 결성할 것을 결의했다. 그 당시 야마카와는 가마쿠라에 있었고, 수요회(야마카와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 그룹) 주요 멤버 3명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달받는다. 야마카와는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에 이견은 없으나,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 점에서, 적어도 사카이 군과 아라하타 군과는 처음부터 의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므로 연기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미 결의해버렸으므로 연기하는 얘기는 꺼낼 수 없었고,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공산당이 건설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니 제1차 공산당은 ‘너무나 무계획적으로 급하게, 조잡하게’ 창설되었다(“자전” 392p.).
모스크바에서 극동제민족대회가 개최된 것은 1922년 1월부터 2월까지이다. 여기서 야마카와가 말한 공산당 결성은 그 이후의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인 1921년 4월경 공산당 ‘준비위원회’라 불리는 회합이 이뤄지고 있었고, 사실상 공산당은 이 시기 활동을 개시했다. 당 결성의 핵심 중 하나인 콘도의 회고에 따르면 ‘사카이가 의장석에 앉ㅎ아 회합의 요지 및 경과 보고를 간단히 말하고, 야마카와가 미리 준비해온 강령, 규약, 방침을 설명’한 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라고 한다. 내무성 경보국이 작성한 ‘최근 특별요시찰인의 상황’(다이쇼 11년 1월)은 이 회합을 상하이에 콘도를 파견하기 위한 회합이라 보고하고 있다.
이듬해 1922년 공산당 창당이 7월 15일에 이뤄졌다는 설이 연표 등에도 채용되어 있다. 이는 타카세 키요시 저 “일본공산당 창립사 이야기”에서 7월 15일 타카세가 잠시 빌려 거주하던 방에서 ‘창립회의’가 열렸다고 밝힌 것에 근거한다. 이 회의는 먼저 결성되어있던 준비위원회의 ‘제1회 정식 세포 대표자 회의’로, 야마카와를 포함한 8명이 출석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의 규약에 기초한 일본지부로써 비합법 조직 공산당을 결성할 필요성이 ‘사카이와 야마카와 두 선생에 의해 설명’되었고, 일동은 이의 없이 가결함으로써 공산당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이 ‘창립회의’를 전후하여 몇 번의 같은 종류의 회의가 야마카와의 자택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열린 것 같다. 아라하타는 하시우라 토키오의 회상을 인용하여 1922년 ‘여름 쯤 하타가야 인근의 화장장 근처 대합 요리집에서 야마카와씨가 잠정 규약 초안을 설명한 모임’이 있었다고 하며, 당의 결성에 관해 ‘특별한 형식과 절차를 밟았던 기억은 없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극히 일부를 소개한 관계자의 회고의 진위에 관해 세부적으로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1921년부터 이듬해까지의 회의에서 야마카와가 강령적 문서를 발표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 관계자 중 야마카와가 이론적인 면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점에 관해서는 관계자의 인식이 일치한다. 또 최근 연구에서는 ‘제1차 공산당은 야마카와가 없다면 불가능한 당이었다’라고 하여 준비위원회로부터 해산에 이르기까지 약 3년의 모든 기간에 있어 야마카와가 당의 중심이었다고 보고 있다. 즉 회합 출석 유무와 간부였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야마카와는 ‘논문과 개인을 통해 집행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시기 야마카와의 발언은 공산당의 방침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앞서 검토한 러시아 혁명론, 카우츠키 비판도 공산당의 견해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아가 ‘보통선거와 무산계급의 전술’에서 보이는 일본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도 사실상 이 당시 공산당의 방침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야마카와의 논문은 점차 변화해간다. 기권전술을 주장하고 4개월 후 “사회주의 연구” 1922년 7월호에 야마카와는 ‘정치의 부정과 정치의 대항’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정치에 대한 무산계급의 태도를 부르주아 정치의 ‘궤도’상에 있는 단계, 정치의 부정, 이를 거친 후 부르주아지의 정치에 대항하는 단계 등 3가지 단계로 구분하고, 현 상황은 제3단계인 ‘정치의 대항’에 있다고 시사한다. 기권 전술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제기한 것으로, 활동가 사이에서 꿋꿋하게 지지받던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도 읽힌다. 같은 호 “사회주의 연구”에는 이전해 12월 18일부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테제’가 ‘노동계급의 “협동작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게재되어있다. 이 ‘테제’의 정확한 제목은 ‘노동자 통일전선에 관한, 아울러 제2, 제2.5 인터내셔널 및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노동자, 그리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적 제조직을 지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테제’이다. 이 ‘테제’의 취지는 분열된 각종 인터내셔널을 향한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각국 공산당과 개량주의적 단체와 생디칼리스트 조직과의 협동전선을 용인하는 한편, 코민테른의 주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것에 있었다. 1920년 8월 결정된 코민테른의 가입조건 21개 조항 중 제7조는 코민테른에 소속된 당은 ‘개량주의와 “중앙파”의 정책과 완전히, 절대적으로 절연’하고, 이것을 ‘당원들에게 선전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1921년 12월 ‘테제’는 이 제7조의 순수성 원칙을 버리고, (어디까지나 독자성을 유지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지만) 개량주의적 단체와의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선언한 것이다.
이 코민테른의 방침 전환에 따라 작성된 것이 그 다음달 발표된 ‘무산계급의 “협동전선”’이다. 이 논무 서두에서 야마카와는 코민테른 제3회 대회의 ‘대중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을 건설하라!’라는 두 슬로건을 소개한다. 그리고 앞서 밝힌 각 인터내셔널 사이의 절충에 관해 서술한 후 코민테른(즉 각국 공산당)의 활동은 개량주의로부터 독립된 조직과 운동을 만드는 단계로부터 ‘대중과 함께 협동하는 전선’을 건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설한다. 즉 아직은 ‘개량주의자와 중간파의 지도 아래에 있는’ 대중과의 협동전선을 맺음을 통해 공산당이 ‘소수자의 덩어리’, ‘선전 기관’에 지나지 않는 현상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민테른 제3회 대회의 ‘대중적 공산당의 형성’ 결의를 충실히 설명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코민테른의 방침 전환을 받아들이고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도 방침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유명한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전위” 1922년 7,8월 합병호)이다. 여기서 야마카와는 무산계급 운동의 첫 걸음은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배 아래 있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순수해’지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 첫걸음을 지나 ‘전위적 소수’가 ‘순수해진 사상을 지닌 채 (중략) 대중 속으로’ 들어갈 단계가 되었으며, ‘대중 속으로’를 ‘새로운 표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방향 전환’에 당연히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개량주의로의 전락이란 비판에 대해, 대중의 실제 요구에 응한 운동을 통해 ‘최후의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지 여부’가 개량주의와 혁명주의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1922년 7월부터 8월에 거쳐 야마카와가 연이어 발표한 3편의 논문 ‘정치의 부정과 정치의 대항’. ‘무산계급의 “협동전선”’,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은 명백하게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방향전환’론이 코민테른 제3회 대회의 ‘테제’에 의한 방침 전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야마카와 본인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방향전환론은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갑자기 쓴 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 자신은 그때까지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늦은 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작성하여, 다음날 아침 다른 논문 대신 이 논문을 인쇄소에 맡기게 되었습니다.’(“자전” 411p.)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의 ‘이전’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4개월 전 ‘보통선거와 무산계급의 전술’과 같은 시기 발표된 ‘노동조합의 진화와 직분’에서는 생디컬리스트적 노동조합론의 한계를 역설하고 있었다. 주로 경제투쟁을 하는 노동조합 이외에 ‘무산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의의와 목적에 기초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었다. 대중적인 정치조직의 필요성은 이 시기부터 야마카와에게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기권전술을 설파한 ‘보통선거와 무산계급의 전술’에서도 의회정책과 직접행동을 양자택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을 것이므로, 의회로의 진출은 부르주아 지배를 안정시키는 것이 된다는 판단에서 ‘적극적 기권’을 주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미성숙한채 끝날 것이라는 판단이 뒤집힌다면, 기권 전술 또한 폐기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집필하고 발표한 시기가 제1차 공산당 결성과 겹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갑자기 생각이 나’게 된 것은 관계자에게 공산당의 방침으로써 보일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에 이치가와 세이이치가 ‘방향전환’론을 ‘근본적으로 일본 공산당의 당 결의를 통해 만들어진 선전문’이라 주장했던 것도 무리한 주장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주도권이 당 측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말년의 야마카와가 ‘제가 개인적인 의견을 발표할 때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당의 의견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술회하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야마카와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산당의) 준비회 구성원이 검토한 후 야마카와에게 작성시켰다’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당시 관계자가 ‘야마카와씨 본인이 중심이다’(타카세), ‘야마카와씨가 지도자였으니까’(우라타 타케오)와 같이 말했다는 점 또한 제1차 공산당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라하타도 ‘적절한 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활동에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고 술회한다. 야마카와 본인의 고찰 결과가 ‘방향전환’으로써 표명되었고, 이것이 관계자 사이에서 당의 방침으로써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야마카와는 ‘방향전환론은 첫째로 나 자신의 자기비판과 청산이고, (중략) 동시에 과거 사회주의 운동의 청산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코민테른의 방침 전환에 영향을 받아, 갓 창당된(혹은 창당을 목전에 둔) 공산당이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그 자신의 운동 경력 속에 있던 생디칼리스트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그 연장선상에서 대중적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비판이 아직 구체적인 운동 방침으로까지 심화하지 못했던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이 시기의 주된 이슈인 과격 사회운동 단속 법안과 보통선거권 운동 등에 있어 ‘대중 속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음에도 야마카와 등은 처음부터 소극적 태세를 유지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코민테른 제3회 대회 ‘전술에 관한 테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동과 조직을 위한 모든 가능성―출판의 자유, 단결의 자유ㅡ 부르주아적 의회주의의 여러 제도’를 ‘공산주의의 무기’로 삼으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야마카와의 사고는 아직은 구체적인 전술에까지 미치지 못했고, 추상적인 슬로건과 각오 정도에 머물렀다.
방향전환론이 어느정도 구체성을 띄기 시작하는 것은 1923년 1월부터이다. ‘당면한 문제’에서 야마카와는 종래의 과격 사회운동 단속 법안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경악스러울 정도의 무저항주의’라 자기비판하고, ‘소극적 부정’으로부터 ‘적극적 대항’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지금까지 반대운동을 견인해온 ‘자유주의자와 급진분자’에 대한 소극적 평가이다. 야마카와는 일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말달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초기부터 ‘혁명적 기력’을 잃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무산계급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관료와 자본의 독재에 대항하기 때문이며, 무산계급은 그들을 위해 ‘잿더미 속을 뒤져 군밤이나 꺼내먹는 역할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즉 소부르주아지는 어차피 투쟁으로부터 탈락할 것이라는, 시비조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적극적 저항’에는 언론에 의한 비판과 원외 대중운동이 상정되어 있을 뿐이고, 선거에서의 ‘의식적 적극적 기권’의 사상은 견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산계급의 정치적 조직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급적으로 결합할 표지판’이 없으므로, 무산계급의 정치 참여가 부르주아 정당에 결박되어버릴 위험성이 크다는 점에 있다. ‘당면한 문제’와 같이 1923년 1월 발표된 ‘무산계급 정치운동의 출발점’에 따르면,
‘무산계급의 정치적 운동’은 ‘현재 부르주아의 정치와 정치기관을 통해’ 부분적 개량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부분적 개량을 쌓아올려 무산계급의 해방을 실현한다는 사상은 여기에서 명확하게 부정되어 있다. 신중한 야마카와는 ‘의회를 이용하는 경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급투쟁의 ‘기운과 형성’을 촉진하는 것에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이러한 주장 뒤에는 일본노동총동맹(구 우애회)의 스즈키 분지 등에 의한 개량주의적 무산정당 결성에 대해 어떤 대응을 취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뇌에 찬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야마카와가 이 논문에서 ‘적극적 저항’ 정치의 사례로 드는 것은 ‘노농 러시아의 승인과 통상 개시’요구와 ‘대러 비간섭 운동’이다. 과연 이것이 방향전환론에서 밝힌 대중의 ‘당면한 생활을 개선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는가. 야마카와의 ‘방향전환’은 아직은 추상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령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의 활동에 대한 규제 철폐,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단축 등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 대항’ 정치는 모두 의회를 통해 실현할 수밖에 없다. 의회에서의 대변자를 구태여 갖지 않고 부르주아(혹은 소부르주아) 정당에 대해 원외로부터 압력을 가한다는 야마카와의 발상이야말로 ‘경악스러운 순종주의’일 것이다. 그 직후 과격 사회운동 단속 법안이 폐지되었을 때 야마카와는 ‘작은 승리의 큰 의의’를 작성하여 노동계급이 명확한 계급의식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대결한 ‘최후의 일전’이었다며 절찬했다. 원외에서의 운동이 거대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운동의 승리는 조직이 약한 무산계급이 의회에 진출한다면 부르주아지에게 결박되어 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야마카와가 선거 보이콧론을 고집한 마지막 논설은 ‘“방향전환과 그 비평”’(“전위” 1923년 2,3월호)였다. 야마카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개인적인 믿음으로는 일본의 실제 형세에 비추어 볼 때 기권하고 보이콧하는 것이 투표를 하는 것보다도 한층 유력한 정치적 저항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콧 전술에는 처음 발표한 때부터 그것이 정치적 무관심에 의한 기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보조건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이 논문에서는 이것이 ‘개인적인 믿음’이라 말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측과 판단’에 기초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는 등, 왠지 확신이 없어 보이는 태도를 보인다. 대체 어째서 야마카와는 이렇게 보이콧 전술을 고집한 것인가.
사실은 이 논문이 명시한대로 의회주의의 부정은 야마카와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결정이었다. 코민테른 제2회 대회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는 역사적으로는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한 의회가 제국주의 시대가 되자 ‘무기력한 외침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말한다. 그리고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지배 형태’이며 ‘자본의 손에 쥐어진 탄압과 억압의 도구’라고 단언하고 있다. 코민테른이 의회주의에 대치시키는 정치형태는 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이고, 의회는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당의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를 정치적 기술적으로 준비하는’것에 있고, 따라서 의회는 노동자 계급의 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의 장이 아닌 원외 대중운동에 종속된 것으로 위치지어진다. 즉 한마디로 정리하면 계급투쟁은 봉기와 내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를 취한다고 상정하고 있고, 의회는 그 과정을 유리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야마카와는 방향전환론 이후에도 짧은 기간동안 러시아 혁명과 유사한 이미지로 혁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카와가 선거 보이콧론을 취하하는 것은 앞선 논문으로부터 1년 이상 경과된 1924년 5월 발표된 ‘일본에서의 민주주의 발달과 무산계급의 정치운동’이다(단 집필은 이전해 11~12월로, 후술할 ‘신형세와 신방책’,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무산계급의 정당’ 집필기가 바로 무산정당 결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논문은 야마카와의 사상의 전환점으로써 중요한 의의를 갖는데, 여기서는 기권 전술 폐기를 중심으로 검토하겠다. 야마카와는 장래의 일본의 방향을 생각하기 위해 영국, 독일, 러시아의 사례를 든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여 의회를 통해 노동당이 권력을 쥘 가능성이 있는 영국, 무산계급이 부르주아지와 협력하여 1918년 부르주아 혁명을 성사시켰지만 사회주의 혁명에는 실패한 독일, 2월 혁명을 통해 성립된 불충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안정시키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한 러시아이다. 야마카와는 일본이 이 3개 국가와 모두 다르다고 말하며, 제국주의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영국처럼 발달할 전망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안정시키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곧바로 전화해야 한다고 논하고, 선거 참여는 민주주의를 안정시키는 것이므로 적극적 기권 전술이 적절하다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유보조건이 있다. 수년 전의 기권 전술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반한 것이었다. (1)일본 무산계급의 조직이 약했으므로 부르주아 세력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계급의식의 ‘결정체’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2)전후 세계 자본주의는 아직 불안정하고, 혁명적 상황이 고양될 것으로 관측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관측’이었고, 현재 ‘절박한’ 상황은 없어졌고, 오히려 ‘완화된 형세’이므로, 적극적 기권은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와는 별개로 야마카와의 기권 전술 철회의 근거는 역시 코민테른의 규정에 있었을 것이다. 앞서 서술한 코민테른의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거와 의회 보이콧, 나아가 의회로부터의 탈퇴가 허용되는 것은 주로 권력을 지향하는 무장 투쟁에 직접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조건이 갖춰져 있을 때이다’.
이 시점에서 야마카와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폭력 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영국만은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앞서 기권 전술을 설파했을 때 그는 이행기가 나름 닥쳐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머나먼 것이라 본 것이다. 절박한 상황이 온다면 기권 전술을 통해 정세를 흔드는 방법을 폐기해선 안 된다. 어찌되었든 상황이 절박하지 않다는 판단은 객관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야마카와 자신의 사고방식이 변화했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변화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변화는, 민주주의의 ‘어느 정도’의 발달이 무산계급의 정치적 성숙에 있어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미발달한 상황에서는 무산계급의 정치적 성숙은 ‘도저히 어려운’ 것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와 진보적 정책이 ‘무산계급을 길들이고 거세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산계급에 있어 유리하다고 말한다.
야마카와는 과거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에 대해 ‘교장 선생님의 학생 회유책’이라던가 ‘데모크라시에서 민주주의를 빼고 남은 것’이라는 등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또 오오야마 이쿠오가 말한 ‘협동이해관념’을 ‘하나의 계급의 이해를 국가의 이름으로 (중략) 다른 계급의 이해에 예속시키려는’ 주장이라 평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적 견해를 여기서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한계가 있을지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충실화가 무산계급의 이익이 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은 큰 전환이다.
두 번째 변화는, 이러한 민본주의에 대한 평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야마카와는 선진국과 달리 일본의 부르주아지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않았던 것을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논문에서는 이후 일본에서 그것이 발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 객관적 조건은 부르주아 정당 내부의 정쟁,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간의 투쟁, 무산계급의 정치적 대두 등 세 가지이다. 그는 특히 두 번째 요인을 중시하여 ‘소부르주아의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등이 오늘날 이상으로 힘을 얻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이 소부르주아 세력의 대두에 대해 무산계급 세력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가 긴급한 과제로 부상한다. 야마카와의 입장에서는 양 계급의 근본적 이해의 대립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에 대한 대항에서 양자가 어떠한 지점까지는 협력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논점에 기초해 야마카와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무산계급은 독립된 정치적 입장에서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를 지지하고 그들의 정치 세력을 유효하게 이용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안정시키지 않는 것을 이익으로 한다’.
무산계급의 운동은 대중운동이므로 비밀리에 조직할 수 없고, 민주주의가 절대불가결하다는 사실은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단언한 내용이다. 야마카와는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의 동향이 일본의 민주주의 발달의 열쇠가 될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는 무산계급에게 있어 ‘유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야마카와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위치에서 한발짝 멀어져(혹은 이를 상대화하여) 카우츠키에, 그리고 민본주의자에 한발짝 가까워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3.3 단일무산정당론
야마카와가 단일무산정당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신형세와 신방책”(1923년 11월 4일 집필)이었다(단 ‘단일 무산정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은 1926년부터이다). 쿠로카와 이오리의 연구에 따르면 1923년 9월 3일 관동 대지진 직후 코민테른으로부터 야마카와에게 합법정당을 결성하라는 지령이 내려졌는데, 야마카와는 그 필요성을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방향전환론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이미 맹아의 형태로 표명되어 있었다. 진중한 야마카와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기 이전부터 문제의식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문은 앞서 말한 ‘일본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발달과 무산계급의 정치운동’과 같은 시기 집필되었다. 여기서 야마카와가 ‘신정세’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선거 실시의 움직임으로, 이 논문에서도 자유와 민주주의의 ‘어느 정도’의 발달이 무산계급이 성숙하는데에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 발달을 바란다는 점에서는 무산계급과 소부르주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것이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정치적 세력’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증진을 미끼로 무산계급이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세력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공장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전무산계급 분자를 수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1개월 후 집필된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무산계급의 정당’의 논지도 동일한데, 여기서는 보통선거로 새로이 선거권을 획득하게 되는 1,000만명의 절반은 무산계급이고, 나머지는 소부르주아 하층과 중간계급이라 추정한다. 이 소부르주아, 중간게급이란 구체적으로는 소상인, 소제조업자, 소자작농, 봉급생활자, 전문직업자, 지식분자 등으로, ‘상당한 다수’이지만 종래의 무산계급 운동에서 과소평가되었다 지적한다. 이렇게 보통선거 실시를 앞두고 종래의 부르주아지와 무산계급 중 하나로 분해되는, 상시적으로 동요하는 계급이라 여겨진 소부르주아지, 중간층의 존재를 야마카와는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그는 주로 무산계급이 소부르주아 자유주의 속에서 ‘용해’되어버릴 위헙성으로써 의식하고 있었다.
‘무산계급정당의 제문제’(1924년 6월)에서는 이 문제를 더욱 발전시킨 고찰이 이뤄진다. 야마카와는 두 가지 지점을 강조한다. 하나는 정당의 성격이다. 요구되는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혁명적 요구를 내건 ‘선전’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당면한 구체적 이해관계와 요구’를 내건 당이다. 즉 필요한 것은 ‘소수의 전위분자’ 조직이 아니라 대중적인 운동체인 것이다. 따라서 조직에서의 결정은 ‘공공연한 토의와 토론’에 의해 일반 대중의 의식에 호소하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대중운동은 ‘밀실 속에서’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야마카와가 이 시점에서 공산당과 대중적인 무산정당을 이율배반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위당적인 조직형태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소부르주아, 중간층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지에 관한 문제이다. 야마카와에 따르면 보통선거 이후 상황은 한편으로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무산계급 운동의 대항이다. 소부르주아는 부르주아와 대항할 때 무산계급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무산계급은 소부르주아의 조직에 포섭되어 흩어져버리지 않도록 독자적인 조직을 가져야만 한다. 거꾸로, 만약 무산계급의 조직이 확고하다면 본래 안정적이지 못한 소부르주아의 ‘상당히 많은 분량이 무산계급의 정치 운동에 참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혹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소부르주아를 부르주아 지배로부터 끌어내어 중립적인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무산계급 승리를 위한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다. 지금까지 야마카와는 소부르주아, 중간층을 무산계급과 대립된 이해관계를 갖고,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가까운 존재라 파악했다. 여기서 그는 견해를 바꾸어, 무산계급과 소부르주아의 부분적인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이 논문을 “무산정당 연구”(1924년 11월 간행)에 수록했을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추가했다. 무산정당은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보다 큰 원을 그리는 사회층, 적어도 자본주의적 현재 질서에 대항하는 반대세력이 될 가능성을 가진 일체의 요소’를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여기서 무산정당은 소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를 고려에 넣은 강령을 가지는 것을 통해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사이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존재로서 구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개된 야마카와의 논문을 제1차 공산당의 움직임과 대조해보자. 1922년 여름, 제1차 공산당이 결성되던 시기 야마카와는 ‘정치의 부정과 정치의 대항’, ‘무산계급의 “협동전선”’,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전환’을 발표했다. 이들의 ‘방향전환’론은 코민테른 제3회 대회의 ‘테제’에 담긴 코민테른의 방침 전환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듬해 1923년 1~2월 ‘당면한 문제’, ‘무산계급 운동의 출발점’, ‘“방향전환”과 그 비평’은 ‘방향전환’론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시켜 제시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이 실천될 새도 없이 6월 5일 ‘제1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 일제 검거사건이 일어난다. 야마카와는 가마쿠라에 귀성중이었기에 검거를 피했지만 기소되었다(이후 무죄 판결). 이 검거사건과 관동대지진 후의 백색테러로 당은 큰 타격을 입고, 10월 제3회 당대회가 개최되어 야마카와에 기초한 운동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연말 당 지도부 내에 해산론이 지배적이 되고 24년 3월 제1차 공산당은 해산된다.
해산은 관계자의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었지만, 야마카와가 ‘가장 철저한 해산 주장자’였다는 점은 많은 증언을 통해 인정된다. 관계자 일제 검거로부터 약 반년 후 1923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야마카와는 앞선 ‘신형세와 신방책’, ‘부르주아 정치권력과 무산계급의 정당’, ‘일본의 민주주의 발달과 무산계급의 정치운동’을 집필한다. 모두 ‘일체의 무산계급 분자를 포용’한 무산정당 결성이 필요함을 호소한 것이다. 비공식 조직으로써의 공산당과 대중적인 무산정당과의 병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야마카와로써는 이 3편의 논문에 코민테른의 지부로써의 공산당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포함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위당을 명확하게 부정하는 뉘앙스를 품은 논문 ‘무산정당의 제문제’는 1924년 6월 발표되는데, 집필은 공산당 해산 다음달에 이뤄졌다. 이 시기에 야마카와의 입장이 굳혀진 것이 아닐까.
‘무산정당의 제문제’에서 제기된 두 가지 주장, 즉 전위당 부정과 모든 반反자본주의적 요소를 포함하는 단일무산정당론은 1925년을 거치며 반복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를 개관해 보자. ‘무산정당과 강령 문제’(1925년 6월)에서는 일본 인구에 포함된 ‘다수의 소부르주아 하층과 중간적 계급’을 부르주아 세력으로부터 끌어내어 분리시키는 것은 ‘무산정당의 임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함한 소부르주아를 , 가령 ‘일본 소비자’로써 파악하는 것을 통해 무산정당은 ‘일정한 정도까지는 그들의 이해와 타협’하는 것이 가능하다.
‘무산정당은 어떠한 조직을 가져야 하는가’(1925년 9월)에서는 무산정당의 임무의 하나로 ‘동요 불안정한 중간 세력 견제’를 내세운다. 그리고 무산정당의 구성 요소를 열거한 후 ‘소부르주아와 중간적 요소’로부터 ‘상당한 수’가 무산정당으로 흘러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무산정당은 계급정당이지만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소부르주아 중간요소의 정치세력’과 맺은 ‘협동전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공산당과 같은 내용물이 ‘순수하고 단일’한 계급정당이 아니고,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개조” 1925년 9월호에 게재된 ‘무산정당은 어떠한 강령을 가져야 하는가’는, 일본 농민조합의 요청에 따른 제1회 무산정당 조직준비 협의회 개최에 따라 작성된 것이다. 야마카와는 여기서 지향해야 할 무산정당이 정밀한 ‘원칙 강령’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 강령’만 존재해도 된다고 말한다. 즉 궁극적 목적에 있어 추상적인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한도의 기초’ 위에 협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같은 제목의 1925년 8월 집필된 논문에서 야마카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정당은 ‘소부르주아적 원칙 강령 위에 선 사회민주당’과 ‘내용적으로 순수하고 단일한 공산당’과 다른, ‘무산계급의 다양한 요소들의 협동전선의 특징적인 한 형태’이다.
야마카와의 무산정당론은 일반적으로 ‘공동전선당’이라 표현된다. 야마카와 본인은 1931년~1932년경 집필된 ‘“공동전선당”이라는 용어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앞서 다룬 ‘무산정당은 어떠한 조직을 가져야 하는가’에서 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는 여기서 ‘협동전선’이라는 표현만이 사용되었고, ‘공동전선당’이라는 단어는 “노농” 창간호 수록 ‘정치적 통일전선으로!’(1927년 12월)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통일전선으로!’에는 공산당에 대한 명확한 비판이 출현하는데, 그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생각은 1925년 8~9월의 논문들에 명시된 바와 같다. 서구형 사회민주주의와도, 전위당인 공산당과도 다른 ‘일본형 사회민주주의’가 여기서 명확히 선언된 것이다.
나가며
1954년 야마카와는 ‘티토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은 국내 정세에 따라 상이해지고,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로의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7년 혁명에 의해 탄생한 러시아의 현 상황은, 내가 모든 생애를 다해 추구해온 사회주의 사회와 비교할 때, 어떤 점에서는 닮았지만 완전히 같다고 하지 못할 정도로 큰 간격이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이 야마카와의 안에서 언제 싹텄는지를 확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1937년 12월 인민전선 사건으로 체포된 후 히가시쵸우후 서에서 집필하여 특고 제1과에 제출된 것으로 보이는 ‘야마카와 히토시 수기’(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 소장)에는 그러한 인식이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공산주의 이론의 성패에 관하여’라는 절에서 야마카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셰비즘은 정권 획득에는 성공한 이론이지만,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나 정권 유지에 과연 성공했는지는 미지수다. ‘국민 다수의 동의에 기초하지 않고 이른바 기습적인 방법을 통해 탈취된 정권의 유지가 얼마나 곤란할지, 그리고 그러한 정권을 무리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오는 참화가 얼마나 클지를 통절히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야마카와는 이 수기에서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러시아라고 하는 ‘특수한 사정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코민테른은 러시아 혁명과 그 성과로서의 소련을 옹호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지만, 획일적으로 각국 혁명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창립된 것 자체가 하나의 근본적 오류’였다고 규탄하고 있다. 또 ‘제1차 공산당의 교훈’이라는 절에서 ‘비밀운동’의 결과 파벌 대립이 생기기 쉬워진 점,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풍조를 낳은 것 등 수많은 폐해를 열거하고, 나아가 코민테른의 지령이 당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1925년부터 시작된 공산당 재건에 대하여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다’(“자전” 423p.)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에 대한 상담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건에 완전히 반대한다는 태도는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1차 공산당 해산 이후에도 곧바로 코민테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야마카와가 러시아 혁명을 상대화하고 코민테른의 개입에 격렬하게 반발하게 되는 것은 재건 공산당 주류와 코민테른에 의한 야마카와 비판이 일어난 1926년 이후일 것이다. 본고는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사색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일본 좌파 운동 번역 > 일본사회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역) 신사회당 위원장의 '공동 테이블' 출범모임 연대인사 (2) | 2021.09.20 |
---|---|
(기사번역) 일본 진보정당, 시민사회 지지모임 '공동 테이블' 출범 (0) | 2021.09.20 |
한일협정 불승인 선언(일본사회당, 1965년) (0) | 2021.02.20 |
일본사회당 강령(1955) - 소위 '우(右)사회당 강령' (0) | 2021.01.20 |
[논문] 일본에서의 구조개혁론② - 일본 구조개혁론 형성과 현대 일본 자본주의 논쟁 (0) | 2021.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