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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 국제기구의 對日외교 정책 분석 본문
학부생 나부랭이 블로그 주인장이 제출한 기말과제 졸고입니다.
소련 공산당 국제기구의 對日외교 정책 분석:
1920년대 후반 코민테른과 전후 코민포름 양자 간 단절성과 연속성을 중심으로
목차
Ⅰ. 서론
Ⅱ. 선행연구와 연구방법
Ⅲ. 스탈린 시기 소련 공산당 국제기구의 노선과 대일정책
1. 스탈린의 국제 공산주의 외교 노선의 단절성과 연속성
2.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의 對 日本共産黨 정책 및 노선
Ⅳ. 코민포름의 對 日共 정책의 혼란과 원인
1. 코민포름과 전후 일본공산당의 혼란
2. 원인 분석-단절성과 연속성을 중심으로
V. 결론
I. 서론
전후 일본공산당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미군에 협조하는 노선, 1950년부터 급격하게 전환된 극좌 모험주의적 폭력혁명 노선, 이후 1955년 다시 ‘국민에 사랑받는 공산당’을 천명하는 온건 노선 등 불과 10년에 불과한 짧은 시기동안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겪은 혼란의 원인은 하나로 집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이러한 혼란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일본공산당 내에서 그 원인을 찾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공산당 지도부의 가부장제적 당 운영, 이들의 코민테른-코민포름 등 소련 공산당에 대한 맹목적 추종 등이 혼란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공이 겪은 혼란을 내부적 요인에서만 찾는 것은 이 혼란의 주된 계기였던 코민포름의 ‘일본 정세에 관하여’가 갖는 의미와 맥락을 과하게 사상하는 것이고, 코민포름 등을 통한 스탈린 외교의 연장선상에 일공이 겪은 혼란이 있을 가능성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본고는 스탈린주의 외교의 특징과 그것이 소련 공산당 국제기구에서 드러난 방식을 검토하고, 이것이 일공에 대한 방침과 노선을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드러났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을 따라 일본공산당이 겪은 혼란을 이들 내부적인 요인을 통해서만 분석하는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코민포름이 전후 일본 정세에서 일정한 의도를 갖고 일본공산당에 개입한 엄연한 행위자이며, 일본공산당이 겪은 혼란을 어느 정도 의도했을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다.
II. 선행연구와 연구 방법
본고의 주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대체로 일본공산당 혹은 일본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코민테른 및 코민포름을 어떻게 인식하였고, 그 인식에 기반해 어떠한 행위가 나타났는지에 관한 연구들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소산홍건(1958)은, 1945년 패전 이후 1950년 냉전체제 형성에 이르기까지 일본공산당이 당수 노사카 산조에 의해 가부장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지적하고,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며 독선적인 당 운영과 더불어 당 지도부의 그릇된 정세 판단에 지친 당원들의 불만이 코민포름 논문을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 분출의 계기가 코민포름 논문에 대한 찬반여부에 있었고, 이를 둘러싸고 파벌이 나뉘어 당내 대립이 격화된 것은 패전 이전부터 형성된 ‘코민테른에 대한 신격화’ 및 ‘공산당의 무오류성 신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소산홍건, 1967).
한편, 후지이 다케시(2006)는 소산홍건의 1967년 저작과 유사하게 일본공산당 내부에 패전 이전부터 ‘코민테른 권위주의’가 확립되었음을 지적한다. 특히, 후쿠모토주의라는 이름으로 일본 공산주의 운동 내에 자생적으로 발생한 후쿠모토 가즈오의 이론과 운동론이 널리 받아들여지자, 코민테른이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후쿠모토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며 지도부에서 축출했던 사건을 거치며, 코민테른이 기존에 일본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갖던 권위가 강화되고 고착화되었다고 지적한다. (후지이, 2006)
위의 선행연구들이 일본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의 코민테른, 코민포름이 갖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논의들이라면, 윤해수(1995)의 연구는 소련의 외교정책에서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보여주는 연구이다. 특히, 스탈린 시기 외교는 1924년까지 기존의 ‘혁명 수출을 통한 세계혁명론’이라는 레닌의 기조를 유지했지만 1927년 이후의 외교는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다가올 사회주의 혁명에서 혁명의 기지인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고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이 이후 코민포름으로도 이어지는 타국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주의적이고 자국 중심적 개입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윤해수, 1995)
E. H. 카(1977)는 코민테른의 각국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적 지배의 원인을 1927년부터의 소련과 서방 국가 사이의 관계 악화에서 찾는다. 서방과의 관계 악화로 전쟁의 위기를 느낀 소련은 서방 국가 내 공산당들에 강경한 좌경노선을 강요하고 사회당 등 비 공산당계 사회주의 세력과의 통일전선을 우경화라 비판함으로써 생존의 경로를 모색하였지만, 1930년대 중반 소련의 현실주의적 외교를 통한 서방과의 반파시즘 공동안보가 구축되기 이전까지 지속된 이러한 좌경화 노선은 각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노동자들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Carr, 1977)
이들 연구는 모두 소련의 거시적인 대외정책 노선만을 설명하거나, 일본공산당 내에서 코민테른 및 코민포름의 노선이 받아들여진 경위만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코민포름의 노선이 왜 코민테른 시기와 달리 불철저하고 간접적 형태가 되었는지 설명하거나, 왜 해당 시기 유럽 공산당들의 통일전선 및 평화공세 전략과 달리 일본 노선에서는 폭력적 지향이 강하게 드러났는지를 다룬 연구는 없다. 이는 한편으로는 소련의 국제 공산주의에 입각한 외교정책의 거시적 분석 속에서 일본 내 공산주의 운동보다는 일본 제국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일본공산당의 혼란과 오류의 배경과 과정을 모두 일본공산당 혹은 일본 사회주의 운동 등 국내적 요인에서 찾는 연구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자와 같은 연구 방법은 전후 일본공산당의 혼란 속에서 코민포름이 갖는 중요성을 사상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스탈린주의 대외정책이 전후 일본에서 관철하고자 했던 노선과 의도가 여기에 어느 정도로 반영된 것인지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본 연구는 우선 윤해수가 제시한 스탈린주의 외교의 특징인 ‘평화공존론’과 ‘전쟁 불가피론’, ‘현실주의 외교’가 코민포름과 코민테른 사이에 어떠한 연속성과 단절성을 갖는지 사례별로 분석하고, 이러한 측면에서의 연속성과 단절성이라는 속성이 일본공산당에 대한 지도의 차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를 추측해보고자 한다.
III. 스탈린 시기 소련 공산당 국제기구의 노선과 對日 정책
1. 스탈린의 국제 공산주의 외교 노선의 단절성과 연속성
윤해수(1995)에 따르면 스탈린 시기 외교 기조는 크게 전쟁 불가피론과 여기에서 기인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일시적) 평화공존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기조 자체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인 제국주의에 돌입한 국가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전쟁을 동반한 자본주의 붕괴의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전쟁 불가피론―과,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일국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며 혁명을 수출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과도적 공존기를 가져야 한다는 판단―일시적 평화공존론―의 일정한 계승이다. 하지만 레닌 시기에 위의 기조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한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과 달리, 스탈린의 외교 노선은 이러한 기조 자체는 계승하면서도 세계혁명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질 수 있는 당면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평화공존론 및 일국사회주의에 무게를 두게 된다. (윤해수, 1995) 따라서 이러한 일국사회주의론과 평화공존론이 확립되는 1927년부터 소련 대외정책의 주안점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국을 승인받는 것에 있었고, 국내 정책의 주안점은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 향상에 있었다. 하지만 E.H.카(1977)가 지적하듯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시도는 소련에 대해 서방이 가진 적의 속에서 실패했고, 이는 소련이 외교적 고립 속에서 전쟁의 위기를 크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가 대 국가의 공식 외교가 소련 대외정책의 한 축이라면, 대외정책의 다른 한 축은 코민테른을 통한 소련 공산당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각국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의 연합인 제2인터내셔널이 자국의 세계대전 참가를 묵인하거나 찬성한 것에 반발하여 레닌 등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며 소비에트 연방이 세워진 이후 국제적인 혁명운동에서의 통일성 있는 행동을 논의하고 혁명을 수출하는 국제기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Carr, 1977) 하지만 이러한 코민테른 본래의 기능은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의 외교 노선이 들어서며 변질되게 된다. 레닌 시기의 코민테른에서도 소련 공산당은 혁명에 성공한 당으로써 높은 위상을 가졌지만, 스탈린 시기의 코민테른에서의 소련 공산당은 기존의 위상을 뛰어넘어 권위적으로 타국 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공산당이 통일전선에 참가해야 한다며 온건한 노선을 갖고 코민테른을 지도하던 부하린이 실각하고, 서방과의 관계 회복에 실패하고 전쟁의 위기를 느낀 스탈린이 좌경적 노선을 소속 공산당들에 강요하던 1928년부터 가속화되었다.(Carr, 1977 ; Riasanovsky, 1977) 즉, 소련 공산당의 코민테른을 통한 각국 공산당에 대한 권위적, 고압적 개입은 소련의 안보를 위해 서방 자본주의 국가 내의 친소 세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적’ 판단에 따른 것이고,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권위를 이용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코민테른의 위상 변화는 스탈린이 기존의 외교 기조를 모두 포기하고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돌아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통일전선 포기, 비(非)공산당 좌익에 대한 적대 등으로 나타나는 스탈린의 좌경적 노선은 ‘전쟁 불가피론’이라는 기조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해수, 1995) 이러한 코민테른의 좌경적, 권위주의적 지도 방침은 1930년대 파시즘에 대항한 서방과의 공동안보에 소련이 동참하게 되며 거두어졌는데, 이는 ‘혁명의 수출’이라는 국제주의적 실천이 서방의 소련에 대한 대외 이미지를 악화시키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소련은 동유럽에 위성 국가들을 확보하며 버퍼존 형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추축국의 패배로 기존의 소련-서방을 묶어주던 반파시즘 공동안보의 필요가 줄어들었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사이의 대결 분위기가 심화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미국의 마셜플랜이나 서방의 반공정책과 소련 적대 정책에 대항할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윤해수, 1995) 이에 따라 이미 1943년 해산한 코민테른과 유사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공산당 혹은 노동자당, 그리고 서유럽 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을 포함해 총 9개국 공산당이 참가하는 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한 기구 ‘코민포름’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 기구는 이전의 코민테른이 갖던 위상과 규모, 역할을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 시기의 경우, 코민테른에서 소련 공산당이 갖던 위상이 높았던 것과 별개로, 코민테른의 운영 목적 자체는 각국의 정세에 대한 심도 있는 상호 논의 및 그에 따른 활동 지침 결정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각국의 대표들이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는 민주집중제적 운영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민포름의 경우는 스탈린 시기까지 표면적으로라도 계승되었던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출’이라는 목표와 달리, 소련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에 따라 냉전 초기 소련의 지정학적 이득과 안보, 조국 방위를 위한 기구였다. (Riasanovsky, 1977) 코민포름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영향은 코민포름의 기관지 ‘영구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기관지를 통한 각국 정세에 대한 분석과 각국 공산당 노선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이뤄졌다. 이러한 방식은 각국 공산당에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기구의 서면 논평을 통한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포름 논평이 현실에서 갖는 각국 공산주의 운동 노선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러한 기구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공식적인 ‘평화공존’ 선언 이후 사라지게 된다.
정리하자면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의 연속성은 전쟁 불가피론에 기반한 소련의 자국 안보 추구용 외곽기구라는 점, 단절성은 코민테른이 갖던 최소한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혹은 ‘혁명의 수출’ 기능의 말소, 규모와 정치적 위상의 추락, 그리고 코민테른과 제2인터내셔널 등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인터내셔널’이라는 기구가 갖던 최소한의 기능조차 사라졌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2.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의 대(對) 일본공산당 정책 및 노선
코민테른은 스탈린 집권 직후부터 일본공산당 노선에 깊이 개입하여 있었다. 일본공산당의 창당은 1922년 코민테른에 참가한 노사카 산조 등의 인물에 의해 이뤄졌다. 또한, 코민테른이 작성한 3개의 ‘테제’는 일본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 혁명론을 담고 있는데, 이 테제들은 큰 수정이나 반발 없이 그대로 일본공산당의 노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큰 틀에서의 노선뿐 아니라, 해당 시기의 정세 분석 또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속에서 일본이 갖는 위상을 감안하여 이뤄졌다. 가령 일본자본주의논쟁 등에서는 소련 연구자들 또한 일본의 천황제적 특질 규정 논쟁 등에 기여한 바가 있다.(소산홍건, 1955) 코민테른의 일본에 대한 이러한 테제와 노선의 하달(?)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면밀한 연구를 거친 후에 이뤄진 것인데, 이 점은 루카치 등에 영향을 받아 ‘분리 후 결합론’ 등을 내세우며 일본공산당의 지도적 위치까지 올랐으나, 당시 코민테른을 담당하던 부하린의 직접적인 반박과 자아비판 요구에 당직을 내려놓게 된 후쿠모토 가즈오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산홍건, 1967) 이렇게 코민테른은 일본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있었으며, 공산당과 대립하던 사회주의 정파 ‘사회주의협회’의 내부 문건(‘사회주의협회테제의 학습을 위하여’)에서 제기되듯 ‘코민테른은 일본공산당 측 인사가 제공하는 편향된 정보만을 토대로 정세를 판단했다’라는 의심 또한 가능하나, 앞선 후쿠모토의 사례나 일본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당이 가져야 할 관계를 테제에 상세히 명시했다는 점(일본공산당 강령문헌집) 등을 볼 때, 최소한 큰 틀에서는 일본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제기되는 주장들이 갖는 요지와 맥락, 자료 등은 파악한 후 지도력을 발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 확산이라는 초기의 목적에 입각하여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하였고, 이는 ‘코민테른 권위주의’가 일본공산당 내에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후지이, 2005) 하지만, 공산당 지도부가 1927년 전원 투옥되고 1945년 패전까지 석방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코민테른은 일본 정세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자신의 지도하에 있는 세력을 잃게 된다.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된 공산당 지도부는 20여 년만에 당을 재건했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가부장적’으로 당을 운영하며 미군을 ‘민주주의를 가져온 해방군’으로 규정한다.(소산홍건, 1967) 이에 코민포름은 1950년 ‘일본 정세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공산당의 노선이 ‘미군을 침략군이라 규정’해야 한다며 비판했고, 일공의 협조주의적 행보에 반기를 든다. 이후 일본공산당이 미군을 침략군이라 규정하고, 당의 전술을 모택동식 유격대 방식으로 전환하자 코민포름은 이를 논평을 통해 승인한다. 이는 일공 내에서 벌어진 코민포름 논평을 둘러싼 분파 갈등인 소감파와 국제파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코민포름의 사후승인을 통해 당의 재통합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소산홍건, 1967)
IV. 코민포름의 대 일공 정책의 혼란과 원인
III장을 통해 일본공산당과 코민테른의 1920년대~전후 행보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본 장에서는 전후의 코민포름과 일본공산당이 겪은 혼란의 양상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코민테른-코민포름 사이의 단절성과 연속성을 중심으로 추측해보도록 할 것이다.
1. 코민포름과 전후 일본공산당의 혼란
앞서 보았듯, 1950년의 코민포름 논평은 일공이 미군을 ‘해방군’이라 규정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일공 지도부는 이러한 논평에 반발하였고, 가부장적으로 운영되던 당내에서는 이러한 반발에 동의하는 ‘소감파’와 코민포름 노선에 동의하는 ‘국제파’라는 파벌이 생겨 반목하게 된다. 한편, 소련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던 미군정은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을 용인하던 정책을 철회하고, 반공주의를 내세운 ‘역코스逆コース’ 정책의 일환으로 일공의 주요 지도부를 당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 하지만 당직을 잃은 이후에도 ‘소감파’는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코민포름의 노선을 비판하고 ‘국제파’를 당직에서 배제한다. 그러던 도중 미군정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며 공산주의자를 체포하고 고용을 금지하는 조치(레드퍼지)가 내려지자, ‘소감파’는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도주하며 일본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의 ‘유격대’ 노선을 따라 ‘침략자 미군정’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코민포름은 이번에는 ‘소감파’의 판단이 올바르다는 내용의 논평을 통해 이를 승인한다. 일공 당원들은 당중앙의 지침에 따라 ‘산촌유격대’에 동참하며 관공서 등에 화염병 테러 등을 감행하며 농민혁명을 선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일본 농촌이 보수화되고 미군정에 의해 지주적 착취관계가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에는 올바른 전술일 수 있었으나 일본의 정세에는 맞지 않는 극좌 모험주의적 행위였다. 결국 농민의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하고, 이듬해 1952년 총선에서 일공이 참패하며 ‘일본공산당은 무오류’라는 신화는 사라진다. 이러한 무장투쟁 노선은 1955년 일본공산당 제 6회 전국협의회(6전협)에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공산당’을 내세우며 폭력혁명을 포기할 때까지 이어졌다. 6전협을 통해 당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공은 코민포름 등 소련 공산당에 대한 의존성과 가부장적 당 운영에 대한 반성을 담은 결의를 채택하는데, 이는 이후 헝가리 사태를 거치면서도 일공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미 수행했다’고 주장하며 분파를 허용하지 않는 독선적 노선이 계속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소산홍건, 1955)
2. 원인 분석-단절성과 연속성을 중심으로
코민테른과 코민포름 양자 사이의 단절성과 연속성은 앞선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하지만 이러한 단절성과 연속성이 동시기 동유럽 공산당을 상대로는 통일전선적, 평화적인 제스처로 나타난 반면 일본공산당에 대해서는 왜 폭력혁명을 선동하는 식으로 나타났는지는 직관적으로 알기 어렵다. 이를 알기 위해선 일본공산당과 코민포름이 겪은 혼란은 이러한 단절성과 연속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코민테른 코민포름의 연속성은 이들이 갖는 권위주의적 태도, 그리고 이들이 가진 소련의 자국방위적 역할이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연속성은 타국 공산당에 대한 ― 특히 소련이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통해 성립된 국가라는 점이 갖는 권위에 기댄―일방적인 노선개입 코민포름 시기에도 동일하게 일어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데, 이는 타국 공산당의 자율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 일본공산당에는 1927년 지도부 전원 검거로 인해 당이 사실상 해산되기 이전뿐 아니라, 30년대부터 45년까지의 공산당 활동 공백기에도 이러한 코민테른 권위주의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령, 코민포름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는 당 중앙에 대한 반발은 당내에 ‘공산당 무오류성’으로 대표되는 따른 반분파주의 정서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파’라는 분파를 형성하게 하며 당의 통일성을 크게 해칠 정도였다. 이후 일공이 코민포름의 입장을 일부 수용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에도 불구하고 반발은 이어졌는데, 이는 당내에 5년간 지속되어온 권위주의적,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반발 또한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권위적인 당 운영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이후에 코민포름에 의해 ‘산촌유격대’ 노선이 승인되자 국제파는 자발적으로 해산하게 된다. 이 사례는 당내갈등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이 해소되지 못한 채였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포름의 행위가 당내 갈등을 일시에 불식시킬 정도로 강력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후 당의 노선이 평화주의에서 급격하게 폭력혁명 노선으로 전환되며 비롯된 당내 피로, 폭력혁명 노선으로 인한 국민의 외면과 선거 참패를 거치며 ‘공산당 무오류성’과 함께 코민포름이 갖는 권위에 대한 신뢰도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한편 단절성으로 지적되는 규모와 위상의 면에서, 코민테른 시기와 달리 코민포름은 서면을 통해서만 일본공산당 노선에 개입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코민테른 시기와 같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타국의 정세 분석에 기반한 테제 하달과 같은 방식보다 불철저하고 비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코민포름의 위상과 규모 자체가 코민테른 시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역할 또한 형식적으로라도 혁명의 수출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전 초기의 사회주의권(특히 소련의) 안보 확보를 위한 정보국으로 축소되었다는 점은 위상과 규모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단절성의 한 측면만을 코민포름의 혼란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는데, 앞서 밝혔듯 코민포름의 동유럽 공산당과 일본공산당에 대한 노선은 각각 통일전선을 주장하는 평화옹호주의와 파괴행위를 통한 무력 혁명 선동이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스탈린이 1950년 체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김동길, 2006), 스탈린의 대외정책에서 동유럽 블록의 확보가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보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특히,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全)지역을 혁명화(革命化)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스탈린의 서술을 통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의 열전에 관심이 쏠려있는 동안 소련은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에 대한 공산당 국제기구의 정책은 강경하고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미국이 대응하는 사이, 소련은 대유럽 정책에서 숨통을 트이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함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공산당’의 극좌와 협조주의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혼란은 일정 정도 코민포름이 의도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고, 이러한 의도는 코민테른의 소련 안보 중심적 행보, 현실주의적 외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V. 결론
스탈린 시기 소련의 국제공산주의와 관련한 대외정책은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양자는 위상과 역할, 규모 등에서 단절성을 가지나, 기본적으로는 스탈린주의 외교의 특징인 현실주의와 평화공존론, 그리고 전쟁불가피론이라는 전제를 모두 연속성있게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대외정책은 주로 대중관계나 한국전쟁을 둘러싼 논의에 그쳐있었고, 일공의 혼란은 일공 내부의 권위주의와 폐쇄성, 그리고 맹목적인 소련 추종에서 찾는 논의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공 특유의 소련 종속성에도 불구하고, 이 혼란 과정에서 코민포름은 중요한 행위자였고, 스탈린의 현실주의적 외교 노선 특히 유럽에서의 영향력 확대라는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관성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특히 유럽 공산당들에 대한 지배력 혹은 티토와의 갈등 등으로만 이야기되는 코민포름 노선들이 정반대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성을 갖고 전체 외교 구상 속에서 일관되게 일공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을 알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VI. 참고문헌
E.H.카. 1977. 러시아 혁명. 나남.
니꼴라이 V. 랴자노프스키. 러시아의 역사II. 까치.
소산홍건. 일본 마르크스주의사 개설. 1967. 이론과 실천.
윤해수. 1995. 러시아 체제변동론. 한울.
후지이 다케시. 2006. ‘코민테른 권위주의’ 성립에 관한 한 시론. 역사연구.
米原 謙. 日本型社会民主主義の形成 : 1920年代前半の山川均. 社会科学
小山弘健. 1953. 日本資本主義論争史. 青木書店
小山弘健. 1966. 戦後日本共産党史. 三月書房.
日本共産党. 1996. 日本共産党綱領文献集. 日本共産党中央委員会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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