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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논쟁이 중국·일본 혁명운동의 전략 설정에 끼친 영향 분석

0079char 2022. 4. 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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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 나부랭이의 소논문 2

 

 

자본주의 논쟁이 중국·일본 혁명운동의 전략 설정에 끼친 영향 분석

1920년대 중국과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서론

  1920년대 러시아, 중국, 일본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Asiatic Mode of Production, AMP)를 포함한 자본주의 논쟁이 첨예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를 둘러싼 자본주의 논쟁은, 그러한 파악과 이해에 따라 혁명운동의 당면과제와 노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노선투쟁이 학계 등 이론전선으로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소산홍건, 1955). 중국의 경우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둘러싸고 당면한 현실을 AMP의 잔존이라는 특수성을 가지며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해야 하는 상태로 볼지, 혹은 단선론적 역사발전 도식에 따라 봉건적 상태로 보아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해야 하는 상태로 볼지의 논쟁이 벌어졌다(신봉수, 2021).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아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했던 노농労農파와, 천황제의 복고를 AMP가 잔존한 반봉건제로 보고 천황제 반대의 민주주의 혁명을 지향했던 강좌講座파 간의 논쟁이 있었다(소산홍건, 1955). AMP가 주요한 논쟁점이었던 중국과 달리, 일본의 경우 노농파에게 AMP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AMP는 논쟁은 강좌파 내 이론가들 사이에서 주로 이뤄졌다는 차이를 갖는다(포겔, 1988). 그러나 논쟁의 주요 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논쟁은 큰 틀에서 자국의 사회발전 단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에 맞는 혁명전략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크게 노동자 중심의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이냐, 혹은 농민 중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냐는 두 입장으로 갈렸다는 점에서 큰 유사성을 보인다. 이는 크게는 양 논쟁이 모두 혁명을 지휘하는 코민테른의 단선론적 역사 인식에 대한 동의 여부를 두고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신봉수 2021 ; 포겔 1988), 작게는 중일 양국의 이론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 논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논쟁과 이론에 대한 검토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포겔 1988, 소산홍건 1955).

  본고는 1920~1930년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의 자본주의 논쟁이 이뤄진 양상을 간략하게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경향을 분류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론들의 분류가 실제 혁명운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선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만, 특정 이론이 어떻게 특정한 혁명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는 그 이론이 내포한 내용 이외에도 구체적 국내외 정세 등 많은 요소들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므로, 본고는 이론과 전략이 갖는 상관관계의 경향성을 통해서만 이를 분석하는 선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본론

 

1. 스탈린 시기 소련의 단선론적 역사발전론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도 불리는 스탈린 사상의 두 축을 이루는 요소는 일국사회주의, 역사 유물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역사 유물론(혹은 사적史的 유물론)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단계들을 5개로 일반화, 보편화시킨 이론이다(신봉수 2021).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제-공산주의로 역사를 도식적으로 분석한 이 이론은 서유럽을 제외한 국가들이 가지는 특수성과 그에 따른 전자본주의적 제형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가령, 1973N,A. 짜골로프 저 정치경제학Kurs polititscheskoi ekonomii’의 경우, 다음의 인용을 통해 특히 아시아 국가의 특수성을 이러한 역사 유물론의 도식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동양의 많은 나라들은 봉건지대 형태의 발전과 봉건영주에 대한 직접생산자의 예속형태의 발전에서 어느 정도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동양에서는, 봉건국가가 토지와 관개시설의 주요한 소유자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대규모 영주경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부역이 아니라 국가관리들을 통해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생산물지대, 심지어는 화폐지대가 봉건지대의 지배적 형태였다. (p. 107)

  한편, 코민테른이 소련의 혁명 성공이 갖는 권위를 이용하여 각국 공산당의 노선에 크게 개입하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단선론적 역사 인식 또한 각국 공산주의 운동의 노선을 확정짓는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2. 일본 자본주의 논쟁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 또한 수입되었다. 부족한 문헌, 일본 정부의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탓에 마르크스주의는 구체적인 운동으로 나타나지는 못했으나, 1920년대에 들어 노동자 운동이 부흥하고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혁명운동의 이론으로서 수용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게 된다(소산홍건, 1967). 이 과정에서 일본의 현실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정당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혁명론을 채택한 노농파와 전위정당론과 반 천황제를 내세운 강좌파가 등장하며 상호 대립하게 된다.

  ‘노농파는 메이지 유신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한다. 이노마타 츠나오 등 노농파 학자는 막말유신기에 쌀이 상품화됨으로써 교환가치가 되었고, 지가(地價)의 발생에 따라 소작료가 지주의 투하자본에 대한 이자로서 계산되었으며, 경제외적 강제가 사법적 관계로 바뀌며 지대의 성격이 봉건적 성격을 잃고 있음을 지적한다(소산홍건, 1955). , 막말유신기를 농촌에서의 수공업이 최소한 매뉴팩처적 성격을 띠어감과 동시에, 화폐경제가 성립되어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는 단계였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을 통해 복고된 천황제는 근대적 자본가로 변모해가는 지주계급과 결탁하여 민주주의만을 제외한 부르주아 혁명을 진행한 것으로 된다(소산홍건, 1967).

  한편, 강좌파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을 반봉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 상품경제가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상품경제는 봉건적 잔재인 농노제의 심화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고, 이는 천황제라는 절대군주가 농민에 가하는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것이라 본 것이다. 노로 에이타로 등 강좌파 학자는 노농파가 주장하는 화폐경제의 성립은 자본주의화와 엄연히 다름을, 즉 쌀의 성격이 상품화되는 것과 농촌의 자본주의화는 별개의 것임을 지적하고, 여전히 농촌에서는 봉건적 지대, 소작형태가 지배적임을 보인다(소산홍건, 1955).

  두 정파는 현실 운동에 있어서도 다른 노선을 택한다. 노농파의 노선은 무산계급 대중정당을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빠르게 전화하는 민주주의 혁명, 강좌파의 노선은 전위정당(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쁘띠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반천황제·봉건제 혁명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부분으로는, 이 노선에 따라 노농파는 천황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나 강좌파는 명확하게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노선 차이는 소산홍건이 주장하듯 견해의 차이가 두 정파의 현실에서의 운동으로 드러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농파의 노선이 마르크스주의적 현실분석이 엄밀하지 않았던 시기부터 이미 노농파의 수장 야마카와 히토시의 유연한(혹은 직관에 의존한) 무산대중정당 전략에 일관되게 존재했다는 점(요네하라 켄, 2017), 일본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했던 강좌파 또한 코민테른이 27년 테제을 통해 단선적 역사발전론에 따른 반 봉건제 투쟁을 할 것을 지시하기 이전까지 야마카와 히토시의 노선에 따랐던 점으로 볼 때, 자본주의 논쟁은 거꾸로 이론을 통한 아정파의 노선을 정당화하는 성격이 더 강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3. 중국의 자본주의 논쟁

  일본과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진행된 자본주의 논쟁의 경우, 큰 틀에서 그 내용이 유사해 보이나 구체적으로는 AMP가 주요 논점이었다는 점 등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1921년 창당한 중국 공산당은 창당 때부터 코민테른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단선적 역사발전론에 따라 중국 사회를 봉건적 단계로 본 소련의 판단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천두슈 등 지도적 인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선적 과제인 부르주아 혁명의 달성을 위해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방식으로 국공합작을 추진한다(신봉수, 2021). 이후 1925-1927 노동자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내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사회 성격이 시기별로 무엇이었는지를 다룬 중국 사회사 논전 등 학계의 논쟁이 발생한다(소산홍건, 1955). 이들 논쟁은 AMP가 무엇인지 규명하려 시도하고, 중국의 AMP가 존재했는지(그리고 여전히 잔존하는지)를 두고 논쟁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 혁명 이후까지 발생한 중국 공산당의 당내 투쟁, 즉 반봉건 부르주아 혁명이냐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이냐의 노선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286차 대표자 회의에서 ‘AMP를 자본주의 이행기가 아닌 봉건적 생산양식의 잔존으로 판단하는 등 소련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결론을 내리고, 이에 반발한 천두슈 등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하며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봉합한다(신봉수, 2021). 그러나 학계 논쟁은 계속해서 발생한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AMP는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졌는데, 이는 AMP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중국 사회에 광범하게 잔존한 것으로 보는 것은 곧 부르주아지가 혁명적 지도력이 안전하게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약한 상태로 보는 것으로, 혁명의 주체를 노동계급이 아닌 농민으로 보아야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포겔, 1988).

  후에 AMP가 노예제에 선행하는 독자적 사회라는 입장으로 전환한 궈모루어는 1925년에는 AMP를 원시 공동체에 한정되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았던 것에 비해, 리지 등은 마르크스가 요강에서 가능한 제형태 중 AMP를 병렬적으로 언급한 것을 근거로 이를 정상적 사회발전 단계의 하나로 보았다고 주장하고 이를 노예제를 대체하는 것으로 파악한다(포겔, 1988).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초기의 논자들이 AMP를 원시공산주의~노예제 시기의 사회질서 혹은 이들 단계에 상응하는 단계로 보았던 것에 비해, 이후에 등장한 왕이츠앙 등의 주장은 AMP를 봉건제의 변형으로 본다. 특히, 러시아 공동체 미르를 들어 러시아의 지리, 공동소유 등이 러시아가 서구와 다른 발전 경로를 따랐음을 주장한 플레하노프, AMP가 중국의 사회와 경제를 20세기 초까지 규정짓고 있다는 마자르 등의 저작이 중국에 유입되면서, 역사발전 도식 속에서 AMP가 차지하는 위치와 그 내용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소산홍건, 1955). 이러한 논쟁은 앞서 다룬 일본의 사례와 유사하게 자국의 사회성격이 반봉건적인지 자본주의적인지를 두고 중국 농촌파중국 경제파가 중국 농촌사회·농업 생산관계 논쟁을 벌인 1930년대 중반 이후 사그라들고(소산홍건, 1955 ; 포겔, 1988), 1940년대 농민혁명을 주장한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을 지배하기 시작하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신봉수, 2021).

 

4. 중국과 일본에서의 자본주의 논쟁 비교

  중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 벌어진 각각의 논쟁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명확하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비록 이론논쟁이 (앞서 언급하였듯) 노선투쟁에 선행하였다기보다 서로 다른 노선들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했던 측면이 더 강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유사한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코민테른의 일관된 동아시아 혁명운동 전략의 지도, 혹은 논쟁 시기 중일 학자들 간의 활발한 이론적 교류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본고는 이러한 원인들과 더불어 서론에서 언급하였듯 자본주의 논쟁 과정에서 등장했던 이론 또한 검토하며 그 경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양국 논쟁에서 공통된 점으로, 이들 논쟁이 모두 자국의 사회구성체를 반봉건적으로 볼지 혹은 자본주의적으로 볼지를 두고 논쟁했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앞에서 검토하였듯 단선적 역사발전론을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만하고 권위주의적인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인식(장궈타오, 신봉수, 2021에서 재인용)중국과 일본에서 도시노동자와 이들의 노동운동이 성장하는 객관적 지표 속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거울삼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혁명전략을 수립하고자 했던 중국의 천두슈, 무산계급정당을 창당하여 발전하는 노동운동에 개입하고자 한 일본의 야마카와 히토시 등 중일 양국의 자생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때문에, 코민테른과 대립하던 중·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선적 역사발전론을 반박하기 위한 독자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코민테른의 입장에 동조하는 자들은 이에 반박하기 위해 자국의 봉건성이 광범하게 잔존함을 입증해야 했다. 이러한 공통된 동기가 공통된 이론투쟁으로 이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양국의 사례에는 각국에 특유한 논쟁이 존재한다. 중국의 AMP를 둘러싼 논쟁과 일본의 천황제에 대한 파악을 둘러싼 논쟁이다. 중국의 경우, AMP의 광범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코민테른의 부르주아 혁명 우선론을 반박하기 위한 논리임과 동시에, 자국의 특수성인 반봉건성을 일정 정도 인정하며 혁명의 주체를 부르주아가 아닌 농민으로 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부르주아 계급과 결탁한 봉건 잔재로 볼지(노농파) 혹은 반봉건의 최대 원인으로 볼지(강좌파, 코민테른)에 따라 각각 자국을 특수성을 가진 자본주의 단계로 보거나 혹은 보편적 역사발전 단계 속의 봉건제로 보게 된다. , 각국에 특유한 논쟁에서 코민테른의 입장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중국의 경우 반봉건성에 대한 인정하고 농민혁명론을 펼치는 것으로 되었으며 일본의 경우 반봉건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판단이 일어난 원인을 중국의 경우 1927년 노동자 혁명의 실패, 일본의 경우 일본공산당만이 반 천황제를 내세웠기 때문에 비롯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들 요인이 실제로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후속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하고, 본고는 코민테른의 혁명운동 지도에 대한 반발이 중일 양국에서 정반대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그만큼 코민테른이 각국의 특수성을 파악함에 있어 안일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론

  본고는 소련의 단선적 역사발전론을 살펴본 후, 이것을 코민테른이 중일 양국의 혁명운동에 동일하게 적용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중일 양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에 동조하거나 반발한 정파들의 이론과 노선은 큰 틀에서 유사성을 띠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가짐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결정적인 차이에 대한 각국의 구체적 원인에 대한 규명은 이뤄내지 못했으나, 본론의 마지막 단에서 언급한 후속 연구를 진행한다면 그러한 원인에 대한 규명과 더불어 각국 생산양식 발전이 가지는 특수성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신봉수. (2021). 현대와 중국. 나무발전소

조슈아 포겔. (1988). 소련·중국·일본에서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 논쟁. 유승희, 김윤호(편역). 마르크스와 아시아(pp. 79-116). 소나무

소산홍건小山弘建. (1967). 日本マルクス主義史概説. 芳賀書店

소산홍건. (1955). 日本資本主義論争史. 青木書店

N.A.짜골로프. (1990). 정치경제학. 중원문화(원본 출판 1973년)

요네하라 켄米原謙. (2017). 日本型社会民主主義の形成. 社会科学 2017(47)

 

뱀발

1. 진독수 노선이 정확히 무엇인지 글에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독수의 노선과 이론을 일본 노농파와 유사한 분류로 바로 엮을 수 없다는 교수님 피드백이 있었다. 본문의 2에서 중국공산당 내 노선투쟁에 대해 좀 더 다뤘어야 했으나, 다시 읽어보니 결론을 내는 필요한 양 이상으로 AMP얘기만 한 것 같다. 진독수 등의 코민테른과의 반목은 1차 국공합작 당시 코민테른의 국민당-공산당 합당 요구를 자유주의자에 대한 투항으로 보고 반대하며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고, 위에서 언급했듯 마링의 태도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이 쌓이는 등, 중국 공산당 내에는 코민테른의 '중국은 봉건'이라는 규정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노동자 중심 투쟁을 원하던 세력이 강했다. 공산당 지도자였던 진독수는 합작 결렬 이후 숙청당하고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한다. 진독수의 사상에 대한 연구나 1920년대 중국공산당 당내투쟁 연구를 조금 더 공부했으면 충분히 노농파의 야마카와 히토시와 엮을만한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다.

2. 결론부가 대충 끝난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마감에 쫓겼기 때문이다.

3. 코민테른에 반기를 든 중국 내 세력을 분리하지 못하고 적은 것이 매우 아쉽다. 마오와 진독수는 사상적으로 연속성이 있지도 않고, 각자의 노선에는 각각의 다른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코민테른 반발하는 입장을 가지고 마오는 당 장악에 성공했고 진독수는 조직하는 족족 다 개같이 멸망했으니, 본문의 3에서 코민테른 반대파의 상이함을 다룰 때 마오를 다룬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진독수에서 마오에게 반대파의 '주류'타이틀이 넘어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은 지난하고 복잡하고 본 주제와 잘 맞지도 않는다.

4. 1927년 봉기를 27년 노동자 혁명이라고 적었다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까였다. 상하이 봉기로 정정당했다. 아 아무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요! 

5. 제목은 논쟁이 전략에 끼친 영향이라고 되어있는데 결론부쯤 가니까 논쟁은 전략에 별 영향을 안줬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중일 양국에서 전략과 세력분화에 제일 영향을 준건 코민테른의 헛발질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생산함수 논쟁에서 마경학자들이 신고전파를 이겼다고 해서 전세계 신자유주의자들이 짐싸들고 집에 가진 않는다. 그런데 이론논쟁의 양상 자체는 중일 양국이 상당히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해갔는데, 이건 진독수같은 양반들이 노농파와 비슷한 논리를 들고 노선 관철해 나간 것에 영향을 주기는 줬을 것. 물론 전략설정과 이론논쟁은 상호 영향을 주는 관계이지, 한쪽이 다른 쪽에 주는 영향이 절대적이진 않다.

6. 이런 마인드로 썼으니 글 가독성이 나쁠 수밖에. 종강말린다. 왜 공부는 남이 시키면 재미없는데 혼자 하면 효율이 바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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